마음이 완악하여(2009. 2. 22)
본문) 마태복음 19장 1-9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서, 요단 강 건너편 유대 지방으로 가셨다.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라왔다. 예수께서는 거기서 그들을 고쳐 주셨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그를 시험하려고 물었다.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는 것과, 그리고 그가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서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신 것을, 너희는 아직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 주고 아내를 버리라고 명령하였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여 준 것이지, 본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음행한 까닭이 아닌데도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드는 사람은, 누구나 간음하는 것이다.”“ (표준새번역 개정판)
마태복음 18장에서 우리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다섯 편의 설교 중에서 네 번째 설교를 읽었습니다. 이름하여 “공동체 설교”라고 말씀드렸던바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 예수를 따르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서로 돕고, 작은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진심으로 용서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의 본문 1절을 통해 우리는 마태복음의 크나큰 전환점에 서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나누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누는 방법이 있습니다.
1-2장 전서(前史) - 예수의 족보와 탄생 이야기
3:1-4:11 활동 준비 기간
4:12-18장 갈릴리 활동기
19-20장 예루살렘 상경기
21-28장 예루살렘 활동기
오늘의 본문 1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서, 요단 강 건너편 유대 지방으로 가셨다.”
이 짤막한 구절로서 이제 예수께서는 갈릴리에서의 활동을 마치시고 운명의 땅, 고난과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땅 유대 지방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라왔는데 그들 대부분은 아프고, 병들고, 가난해서 고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 기자는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을 고쳐 주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아는 대로 예수께서 유대지방으로 올라가는 것은 결코 재미있고, 신나는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서 예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결코 예수를 환영하고 주님으로 믿고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육대지방은 갈릴리와는 전혀 달리 가진 것이 많고, 기득권을 누리는 자들이 사는 곳이었고, 지배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주로 사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예수의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그것을 우습게 여기고, 깔보고, 내려다보던 사람들이 주로 사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그동안 갈릴리에서 행하신 모든 가르침과 기적을 듣고 긴장한 채 예수를 저지하고, 없애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뭔가 긴장되고, 뭔가 좋지 않은 기운이 감도는 그런 상황 속에서 예수는 유대지방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래서 예수께서 유대지방으로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부닥친 사건이 바로 바리새파 사람들과의 대결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 기자는 사건의 시작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그를 시험하려고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반대하는 세력의 앞잡이인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시험하려고 다가왔습니다. 시험에 빠뜨려 아예 유대지방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막으려고 작정을 하고 덤벼든 것입니다. 그것도 인간이 살아가면서 누구나 겪게 되는, 인생의 기본 중의 하나인 결혼 문제를 가지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들은 대뜸 예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그야말로 철저하게 남성 중심, 남편 중심의 사고방식이요, 유대 랍비들의 가르침 중심의 질문입니다. 여자, 아내의 입장을 조금도 생각지 않고, 남편이 어떤 트집이든지 잡아서 제 마음대로 아내를 버려도 되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당시의 대표적인 랍비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대표적인 랍비들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랍비 힐렐 - 남자는 자기 아내가 요리를 제대로 못한다는 단순한 구실만으로도 그녀를 버 릴 수 있다.
랍비 샴마이 - 오직 간음만이 아내를 소박시키는 동기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힐렐은 그야말로 말도 되지 않는 지나친 남성 위주의 가르침을 주고, 샴마이는 그래도 합리적이고 아내를 보호해주는 판단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힐렐은 물론이요, 샴마이마저도 판단은 오로지 남편이 하는 것이고, 아내가 간음했느냐 아니냐도 남편이 판단하는 것이기에 그의 가르침 역시 일방적인 주장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 랍비들의 가르침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무엇인가 하면 남편들은 아내들을 무슨 구실이든지 잡아서 내쫓을 수 있다고 가르치면서도 남편이 간음을 한다던지, 불법을 행한다 하더라도 그 남편을 쫓아낼 권리가 아내들에게는 없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남자들은 무슨 짓을 해도 괜찮고, 여자들은 조금만 잘못해도 쫓아낼 수 있다는 것이 랍비들의 가르침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힐렐이든 샴마이든 그들의 가르침은 지극히 남자들만을 위한 가르침이었지 결코 여자들의 입장에서 받아드일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의 질문 역시 랍비들의 가르침에서 한걸음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여자를 철저하게 물건 취급하면서 제 욕심에 따라 마음대로 버리겠다고 하는 주장인 것입니다. 힐렐이든 샴마이든 결국 남자는 주인이고 여자는 소유물이라는 생각이 그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당연히 예수께서는 그것을 반대하셨습니다. 그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는 것과, 그리고 그가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서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신 것을, 너희는 아직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본문 4-6절)
그렇습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한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시어 그 안에 살게 하실 때, 기본적인 질서로 만드신 것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루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 창세기의 말씀을 인용하여 대답하심으로써 바리새파 사람들의 오만함과 사악함을 여지없이 깨뜨리셨습니다.
분명히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동등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으며, 그 둘은 똑같은 축복을 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창세기 1:26-28)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으니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일방적으로 여자를 쫓아내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창세기 2장에 의하면 결혼한 남자와 여자는 한 몸이기에 남자가 일방적으로 여자를 버리는 것은 창조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 남자가 말하였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창세기 2:23-24)
그렇습니다.‘가정은 창조 자체, 즉 하나님의 계획의 근원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남자가 그것을 제 마음대로 깨뜨리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도전이요 따라서 그것은 죄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창세기에 나오는 그 말씀들을 근거로 해서 이혼을 하면 안 된다고, 특히 남자가 여자를 마음대로 버리는 것은 죄악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자, 이제 바리새인들이 물러날 때가 되었습니다. 자기들이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악인들은 결코 쉽게 물러나지 않습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께 순순하게 복종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시 따지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고 아내를 버리라고 명령하였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그들은 이제 신명기 24장의 말씀을 들이대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 주신 말씀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남녀가 결혼을 하고 난 다음에, 남편이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하여 아내와 같이 살 마음이 없을 때에는,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써주고, 그 여자를 자기 집에서 내 보낼 수 있습니다.” (신명기 24:1)
여러분!
이 구절만 놓고 보면 어느 정도 합리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쉽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했을 때, 즉 아내가 남편 모르게 수치스러운 일을 저지른 것을 보게 되었을 때,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써 주고 아내를 내보낼 수 있다고 되어 있으니 이는 당연한 노릇 아닌가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중요한 것은 도대체 왜 이런 구절이 나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남편들이 제 마음대로 아내를 버리고, 심지어는 이혼증서도 써 주지 않고 내쫓음으로써 아내들로 하여금 그 어디에 가서도 살 수 없게 만드는 패악한 행위들이 너무나 많았기에 그것을 금지하기 위해 이런 구절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여러 여자들을 거느리고 살면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내를 마음대로 내쫓아버리는 그러한 세상, 만일에 그랬다가 그 쫓겨난 여자가 도저히 먹고살 수 없어서 다른 남자를 만나서 살게 되면 이제는 그 여자가 간음했다고 해서 그 여자를 돌로 쳐서 죽이는 세상, 그래서 여자들이 쫓겨나고 살 수 없는 그런 세상에서 여자들을 살리는 방법으로 나온 것이 바로 이혼증서를 써주게 하고 그렇게 이혼증서를 받은 여자는 다른 남자를 만나서 살 수 있게 해 주기 위한 궁여지책인 것입니다. 모세는 그래서 이혼증서를 써 줌으로써 그 여인이 다른 남자를 만나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배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신명기 24장 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여자가 그의 집을 떠나가서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는데,.....”
그러니까 신명기 24장의 이 구절은 여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구절이지, 결코 남자들이 마음대로 이혼하라고 가르쳐주는 구절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이 구절을 이용해서 이혼을 합리화시키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가증되고, 위선적인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시 여자들이 얼마나 차별을 받고 불공평했는지는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 사건’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간음현장에서 붙잡혔다면 틀림없이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었을 텐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여자만 끌고 와서 그 죄를 물었던 것이지요.
결국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근본적인 문제는 남편이 아내를 싫어하게 되었을 때 얼마든지 트집을 잡고 죄를 뒤집어 씌워서 내쫓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근거를 모세의 율법에서 찾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여 준 것이지, 본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음행한 까닭이 아닌데도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드는 사람은, 누구나 간음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께서는 당시 사회에서 일방적인 약자요, 아무런 권리를 가질 수 없었던 여인들, 특히 그 중에서도 남편으로부터 버림받고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여인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아내를 소유물로 생각하고 함부로, 제 마음대로 버리고 이혼하는 남편들을 향해 그것은 엄청난 죄악이라고, 그러니 진정한 사랑을 회복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예수는 갈릴리를 떠나 유대 지방으로 올라가시게 되었는데 처음부터 율법을 문자적으로는 지키면서도 그 참된 정신은 잃어버린 바리새인들과 부딪힘으로써 앞으로의 여정이 얼마나 험난하고 힘든 일이 될 것인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율법의 참된 정신, 작은 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받아들이고 사랑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율법조항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참된 정신을 깨닫고 그 정신을 삶 속에서 실천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는 마음이 완악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도 마음이 완악한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기독교인인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입니다. 작은 자를 사랑하지 않고,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가기에 그들은 진실로 예수의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진실로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것을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일생동안 이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태복음강해(06.9.17-10.4.18) > 2009 년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9. 3. 8 /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 마태복음 19:16-22 (0) | 2015.04.03 |
---|---|
2009. 3. 1 / 하늘나라의 주인공 / 마태복음 19:10-15 (0) | 2015.04.03 |
2009. 2. 15 / 진심으로 용서하며 / 마태복음 18:21-35 (0) | 2015.04.03 |
2009. 2. 8 / 주님이 계신 곳 / 마태복음 18:15-20 (0) | 2015.04.03 |
2009. 2. 1 / 너희의 책임이다 / 마태복음 18:10-14 (0) | 2015.0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