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2009.1.4)
본문) 마태복음 17:14-20
“그들이 무리에게 오니, 한 사람이 예수께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주님, 내 아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간질병으로 몹시 고통받고 있습니다. 자주 불 속에 빠지기도 하고, 물 속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이를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에게 참아야 하겠느냐?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 그리고 예수께서 귀신을 꾸짖으셨다. 그러자 귀신이 아이에게서 나가고, 아이는 그 순간에 나았다. 그 때에 제자들이 따로 예수께 다가가서 물었다. “우리는 어찌하여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가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요, 너희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 (표준새번역 개정판)
오늘의 본문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 세 군데에 다 나오고 있는데 서로를 비교해 보면 다른 기적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마가복음에 가장 자세하게 나와 있고, 마태와 누가는 마가복음의 내용을 일부분 생략한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태복음은 내용은 짧으면서도 마가나 누가에는 없는 예수의 말씀이 덧붙어 있음으로써 복음서 기자가 오늘의 본문을 통해 진짜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20절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본문에 나와 있는 기적 이야기는 사실은 20절을 말하고 싶어서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 제목도 20절에서 따온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마태나 누가에 비해 훨씬 짧은 복음서입니다. 마태가 28장, 누가가 24장으로 되어 있는데 비해 마가복음은 불과 16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체적인 내용이 적은 편인데 유난히 기적 이야기들만은 제일 길게, 충실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마가복음 기자가 기적 이야기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과 같은 기적 사건이 마가복음 9:14-29까지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오늘의 본문과 달리 참으로 드라마틱하고 흥미진진합니다. 우선 얼핏 보기에도 아주 깁니다.
예수께서 세 제자와 함께 산에서 내려오시자 나머지 제자들이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예수를 보자 달려왔고,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그들과 무슨 논쟁을 하고 있었느냐?” 자, 이제 논쟁의 내용이 나옵니다.
귀신 들린 아이를 데리고 왔더니 제자들이 못 고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들은 왜 못 고치느냐고 시비를 걸었을 것이고, 제자들은 고칠 수 있다고, 두고 보라고 큰소리쳤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아이를 데려오라 명령하셨고, 마침내 복잡한 과정을 거쳐 아이를 고쳐주셨습니다. 그 와중에 마가복음 기자가 진정 하고 싶은 말씀이 나옵니다. 바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여기 들어 있습니다.
“ ‘할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마가복음 9:23) 그래서 아이 아버지가 외쳤습니다.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
그리고는 끝에 가서 기도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시는 것으로 사건은 끝을 맺습니다.
이 마가복음의 기록이 무려 열일곱 절이나 되는데 비해 마태와 누가는 똑같은 사건을 기록하면서 불과 일곱 절씩 밖에는 쓰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마태는 그나마 마지막 한 구절은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덧붙여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마태와 누가복음 기자는 마가복음의 내용을 참조하기는 했지만 과감히 생략할 것을 생략하고 자기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 전하고 싶은 메시지만을 담아놓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기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요?
자, 여기 큰 곤경에 처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어린 아들이 있는데 그는 그만 간질병에 걸려서 몹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어떻게든 아들의 병을 고쳐주고 싶었지만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는 아들을 고치기 위해 지금까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을 것입니다. 용하다는 의원은 다 찾아갔을 것이고, 좋은 약은 다 구해다 먹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는 지금 크나큰 곤경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여기 간질병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이 단어는 “seleniagetai"인데 나와 있는 증세로 보아 학자들은 이 단어를 몽유병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니까 자다가 꿈결에 돌아다니면서 불 속에 빠지기도 하고, 물속에 빠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당시 사람들이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귀신이 들렸다고 밖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제 예수께 고침을 받기 위해 찾아왔는데 하필이면 예수는 산에 올라가 안계시고 제자들 아홉 명만 있으니까 그 아버지는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청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좇아내는 일을 행하시는 것을 많이 보았으니까 자기들도 당연히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큰소리쳤을 것입니다. 우리가 귀신을 쫓아내 주겠다.
그러나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고, 소란만 일어났습니다. 그러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셨으니 이제 예수께 청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에게 참아야 하겠느냐?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라고요? 누구에게 하신 말씀입니까? 그 아이 아버지에게 입니까? 아이 아버지는 아이를 고치기 위해 고생한 죄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그 아버지를 향해 꾸짖었을 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세대라는 것이 한 개인을 나타내는 표현이 아니니까 이것은 분명히 한 개인을 꾸짖는 표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는 누구를 향해서 하신 꾸중인가? 이 표현은 신명기 32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늘아,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땅아,
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어라.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풀밭을 적시는 소나기다.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채소 위에 내리는 가랑비다.
내가 주님의 이름을 선포할 때에,
너희는
‘우리의 하나님 위대하시다’
하고 응답하여라.
하나님은 반석,
하시는 일마다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은 올곧다.
그는 거짓이 없고,
진실하신 하나님이시다.
의로우시고 곧기만 하시다.
그러나 너희가 하나님께 맞서
악한 짓을 하니,
수치스럽게도 너희는 이미
그의 자녀가 아니요,
비뚤어지고 뒤틀린 세대이다.
어리석은 백성아,
이 미련한 민족아,
너희는 어찌하여
주님께 이처럼 갚느냐?
그는 너희를 지으신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희를 만드시고
일으키신 분이 아니시냐?“ (신명기 32:1-6)
이 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까지 인도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깨우침을 주면서 불렀던 노래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올곧게 인도하시는데 그 백성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불평하고, 우상을 숭배하기에 그들을 꾸짖은 말씀입니다. 이것은 어느 한 개인을 향한 말씀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향한 꾸중의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본문 17절에 나오는 말씀,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라는 이 구절도 예수를 찾아온 아이 아버지 개인을 향한 꾸중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 전체를 향한 꾸중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꾸중을 하셨는가? 예수께서 그렇게도 사랑을 베푸시고, 구원을 이루기를 원하셨는데 끝내 구원사역을 거부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게 되는 그 백성들의 패역함을 기억하시고 꾸짖으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오늘의 본문 바로 앞과 바로 다음에 예수의 수난 예고가 나와 있는 것입니다.
아이를 데리고 오자 예수께서 귀신을 꾸짖으셨고, 그러자 귀신이 아이에게서 나가고, 아이는 그 순간 나았습니다. 마가복음에 나오는 복잡한 과정, 즉 예수께서 귀신을 꾸짖으시자 귀신이 소리를 지르고 아이에게 심한 경련을 일으켜 놓고 나갔다는 것,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자 모두들 ‘아이가 죽었다’고 수군거린 이야기,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신 이야기 등이 모두 마태복음에는 생략되었습니다. 이는 즉 마태복음에 의하면 그 과정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중요한 것은 단 한 가지, 예수는 말씀 한 마디로 귀신을 내쫓으실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마태복음 기자는 단 한 마디로 표현합니다.
“아이는 그 순간에 나았다.”
그리고는 아이와 아이의 아버지는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야기가 확 바뀌어 버립니다. 제자들이 예수에게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마가복음에도 똑같은 질문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따로 그에게 물어 보았다.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 (마가복음 9:28)
오늘의 본문에도 이 질문이 나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따로 예수께 다가가서 물었다. ‘우리는 어찌하여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 (마태복음 17:19)
누가복음에는 아예 이러한 질문 자체가 생략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마가와 마태만 비교할 수밖에 없는데 뜻밖에도 같은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이 전혀 다릅니다. 먼저 마가복음은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런 부류는 기도로 쫓아내지 않고는, 어떤 수로도 쫓아낼 수 없다.’ ” (마가복음 9:29)
한 마디로 기도를 강조하시는 대답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는 전혀 다른 대답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가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요, 너희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 (마태복음 17:20)
그렇습니다.
여기서는 기도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것인가요?
사실 오늘의 본문에서 핵심이 되는 20절과 비슷한 말씀들은 복음서에 또 나와 있습니다. 우선 누가복음 17:5-6절을 봅시다.
“ 사도들이 주님께 말하였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뽕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기어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 ” (누가복음 17:5-6)
마태복음에 의하면 겨자씨 힌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산도 옮길 수 있다는데 여기는 산이 뽕나무로 바뀌었습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마가복음 11장에도 나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어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번쩍 들려서 바다에 빠져라’ 하고 말하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고 말한 대로 될 것을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마가복음 11:23)
이것과 같은 이야기는 마태복음 21장에도 나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믿고 의심하지 않으면, 이 무화과나무에 한 일을 너희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서 바다에 빠져라’ 하고 말해도, 그렇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 21:21)
지금까지 소개한 네 군데 말씀이 다 비슷비슷하지만 그 중에서 오늘의 본문이 가장 과격하게 들립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가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무엇입니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면 그야말로 가장 작은 믿음, 보잘 것 없는 믿음이라고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앗을 흔히 겨자씨라고 부르는 것을 이미 보았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작은 믿음이 ‘산을 옮긴다’고요?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라면 그것은 완전한 믿음 아닙니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지적했지요.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3:1-2)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은 모든 믿음, 완전한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완전한 믿음, 모든 믿음이라는 말이 되는가요?
저는 여기서 겨자씨와 산을 비교해 봅니다. 그야말로 극과 극의 대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겨자씨와 세상에서 가장 큰 덩어리인 산, 이것의 비교를 통해 저는 지금 제자들의 믿음 없음과 주님의 크고 위대하신 믿음을 보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그 많은 기적과 말씀들을 보고 들으면서도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귀신을 쫓아내지도 못했고, 예수의 사명을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22절에서 다시 두 번째로 수난예고를 하시자 몹시 슬퍼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응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죽음을 향해 걸어가실 만큼 큰 믿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로 그런 믿음을 가지라고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믿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이라도 있다면 산을 옮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란 바로 십자가를 통한 구원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것은 당시 제자들이 전혀 본 적이 없고, 그 누구도 행한 적이 없는 사건입니다. 그러니 믿을래야 믿을 수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행적과 말씀에 의지하여 믿는다면, 그것이 아주 작은 믿음이라 하더라도 진실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아주 작지만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인 것입니다. 바로 그런 믿음을 가지라고 주님은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너무나 작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믿음, 제대로 된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이라도 있다면 결국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신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2009년 한 해, 이 믿음 가지고 힘있게 출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태복음강해(06.9.17-10.4.18) > 2009 년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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