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넘어서 / 2008. 6. 22
본문) 마태복음 13:1-9
“그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오셔서, 바닷가에 앉으셨다. 많은 무리가 모여드니, 예수께서는 배에 올라가서 앉으셨다. 무리는 모두 물가에 앉으셨다. 무리는 모두 물가에 서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여러 가지 일을 말씀하셨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아라. 씨를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니, 새들이 와서, 그것을 쪼아 먹었다. 또 더러는 흙이 많지 않은 돌짝밭에 떨어지니, 흙이 깊지 않아서 싹은 곧 났지만, 해가 뜨지 타버리고, 뿌리가 없어서 말라버렸다. 또 더러는 가시덤불에 떨어지니, 가시덤불이 자라서 그 기운을 막았다. 그러나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배가 되고, 어떤 것은 육십 배가 되고,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 (표준새번역 개정판)
자, 우리는 이제 크게 보아서 마태복음에 들어있는 다섯 편의 설교 가운데 세 번째 설교에 해당되는 13장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물론 학자들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마는, 즉 마태복음 안에 여섯 편의 설교가 있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고, 일곱 편의 설교가 있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마는 저는 마태복음을 다섯 편의 설교라고 하는 기둥으로 세워진 집으로 보고 맨 마지막에도 아주 짧은 설교로서의 마무리를 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마태복음의 맨 마지막 부분도 설교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8:18-20)
이것은 마태복음의 마무리이자 세상을 향한 출구인 셈입니다. 세상을 향해 나아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세상에서 그것을 이루라는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물론 이 다섯 편의 설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식으로 표현하면 하늘나라입니다.
첫 번째 설교는 5-7장까지에 나오는 ‘산상설교’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하나님 나라의 헌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두 번째 설교는 10장에 나오는바 “파견 설교‘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기 위해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그 제자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행하신 설교입니다.
이제 세 번째 설교에 해당하는 13장은 한 마디로 “비유설교‘입니다. 복음서 기자는 여기에 일곱 개의 비유를 모아놓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것인지를 이해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우선 비유란 무엇입니까? 비유란 인간의 체험을 넘어서는 까닭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없는 특이한 어떤 것을, 잘 알려진 평범한 사건들이나 상황을 이용해서 암시하는 하나의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바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체험을 넘어서는 신비한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말로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쉬운 이야기를 만들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지적으로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명확하고 엄밀하게 정의하는 일 역시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 무엇과 같다”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13장에 일곱 개의 비유가 나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본문을 보시면 그 비유들마다 각각의 제목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1-9절),
밀과 가라지의 비유(24-30절),
겨자씨 비유(31-32절),
누룩의 비유(33절),
세 가지 비유(44-50절).
이렇게 해서 일곱 개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그 일곱 개의 비유를 읽어보면 오늘의 본문을 제외한 나머지 여섯 개의 비유는 한결같이 똑같은 단어로 시작합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다가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다.” (24절)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31절)
“하늘나라는 누룩과 같다.” (33절)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놓은 보물과 같다.” (44절)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 (45절)
“하늘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던져서 온갖 좋은 고기를 잡아 올리는 것과 같다.” (47절)
그렇습니다.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까 비유는 곧 하늘나라를 이해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의 본문에는 “하늘나라는”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표현이 나오지 않으니까 일곱 개의 비유 중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이 비유만은 하늘나라와 관계없다고 보아야 하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비록 오늘의 본문에는 그 표현이 나오지 않지만 뒤에 이어서 나오는 설명문에 두 번씩이나 하늘나라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오늘의 본문도 역시 하늘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담은 비유인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을 허락해 주셨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해주지 않으셨다.’ ” (11절)
“너희는 이제 씨를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무슨 뜻을 지녔는지를 들어라. 누구든지 하늘나라를 두고 하는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면, . . . ” (18-19절)
그러니까 오늘의 본문도 철저하게 하늘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담은 비유인 것을 기억하고 본문을 읽어가야 합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고 있는가요?
자, 여기 농부가 한 사람 있습니다. 씨를 뿌릴 때가 되었기에 이 농부는 씨를 뿌리러 밭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씨를 뿌리기 시작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그 농부가 뿌리는 시가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니, 새들이 와서, 그것을 쪼아 먹었습니다. 또 더러는 흙이 많지 앟은 돌짝밭에 떨어졌습니다. 흙이 깊지 않아서 싹은 곧 났지만, 그만 해가 뜨자 타버리고,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렸습니다. 또 더러는 가시덤불에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씨앗이 자라기는 자랐지만 가시덤불이 더 빨리 자라서 그 곡식의 기운을 막아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만 아무 열매도 맺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찌 이런 농부가 있을 수 있습니까? 농사짓는 사람이 어찌 그렇게 무심할 수 있고, 그 귀한 씨앗을 함부로 내던지다시피 하면서 뿌릴 수 있단 말입니까? 그 농부는 아무래도 못된 농부인 것 같습니다. 도대체 그 어떤 농부가 씨를 뿌리면서 길가에도 떨어지게 만들고, 돌짝밭에 떨어지게 만들고, 가시덤불 위에도 떨어지게 만든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예수께서 예로 든 농부는 어떤 사람이기에 함부로 씨를 뿌린다는 말입니까? 과연 그런 농부가 있기는 하단 말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의 상황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지역은 주로 석회암 지대이고 따라서 땅도 아주 투박하고, 기름지지 않아서 농사짓기에 힘든 땅입니다. 구래서 그 지역 사람들은 농사보다는 들판에 나는 풀로 가축을 기르는 목축을 주로 했었습니다. 더구나 비료나 거름이 넉넉한 것이 아니기에 밭이 있다고 해서 매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거기서 농사짓는 사람들은 밭을 적어도 3등분해서 해마다 하나씩은 묵혀두었다가 그 다음 해에 농사를 짓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묵힌 밭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길가와 같이 되기도 하고, 또 가시나무가 자라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석회암 지대의 겉에만 흙이 얇게 덮혀 있어서 씨를 먼저 심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유다의 농부들은 씨를 먼저 다 뿌리고난 후에 밭을 갈아엎어서 씨앗이 땅에 묻히게 했던 것이고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농부는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 농부는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습니다. 돌짝밭이라면 먼저 돌멩이라도 꺼내고, 가시덤불이 자란 것이 있다면 그것을 먼저 없애버리고 씨를 뿌려야 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들을 그냥 내버려둔 채 씨를 뿌리고는 거기서 씨앗들이 자라서 열매를 맺기를 바란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렇습니다.
그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 농부는 어리석은 농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씨앗을 뿌리는 농부가 어리석은 농부라는 것을 예수께서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농부가 씨를 뿌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 풍성한 수확을 거두는 데 있습니다. 농부는 오직 씨앗이 자라서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을 기대하고 씨앗을 뿌립니다. 그리고 수확이 풍성한가 아닌가 하는 것은 사실은 나중에 가 보아야 압니다. 대부분의 농부들은 정성껏 씨앗을 잘 뿌리고, 그 후 추수가 되었을 때 많은 곡식을 거두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씨를 뿌릴 때 처음부터 거둘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씨를 뿌리는 농부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농부는 이미 시작할 때 실패할 것이 뻔히 드러납니다. 씨가 길가에 떨어져서 새가 쪼아 먹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흙이 많지 않은 돌짝밭에 떨어져서, 싹은 났지만 곧 말라버릴 것을 보고 있습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 농부는 씨앗을 뿌리는 파종기에 이미 실패를 거듭거듭 겪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농사에는 이제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의 농사는 실패로 끝날 것이 너무나 뻔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차라리 포기하는 것이 나아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농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거듭거듭 실패하고 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록 지금 실패하고 있지만 미래의 보이지 않는 수확에 희망을 걸었다는 말입니다. 비록 지금은 실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때가 지나면 반드시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자연의 철칙이며, 모든 성실한 농부는 바로 이 철칙에 의거하여 거듭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 즉 농사를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농부는 분명히 길가에 떨어진 씨앗들, 돌짝밭에 떨어진 씨앗들, 그리고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들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눈에 뻔히 보이지만 그러나 분명히 기름진 땅에 떨어진 씨앗들도 있을 것이고, 그것들은 반드시 잘 자라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는 바로 그 희망을 보고 씨앗을 뿌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바로 당신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농부는 바로 예수 자신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행한 첫 번째 설교부터 그는 거듭거듭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그 표징으로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수가 아무리 끊임없이 설교를 선포하고, 아무리 많은 기적을 행하더라도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뻔히 실패할 것이 내다보이는 상황에서도 씨를 뿌리는 어리석은 농부와도 같아 보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비웃고 손가락질 합니다. 심지어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자매들까지도 예수에게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집에 가자고 하면서 데리러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 바로 앞에 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마가복음 3장에는 예수가 미쳤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를 데리러 왔다고까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당시 사람들과 가족들은 한결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있기는 어디 있느냐?”
“당신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눈에 보이느냐?”
“당신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당신도 결국 사탄의 도움을 받아서 역사하는 것 아니냐?”
“쓸데없는 수고 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살아라.”
그러나 예수는 대답합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배가 되고, 어떤 것은 육십 배가 되고,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그렇습니다.
예수의 복음 선포 사역은 실패로 보였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정성껏 말씀을 선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도 정성을 다해 사람들을 고치시고 기적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끝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실패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실패를 넘어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이제 추수 때가 되면 넘실대는 곡식이 일어서 출렁거릴 것을 바라보며 희망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선포한 메시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며 사는 우리의 삶도 힘들고 어렵습니다. 제가 일생을 걸고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을 선포하신 주님과 그 말씀을 이어받아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던 많은 주위 종들의 삶은 실패한 삶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선포하고 있는 제 삶도 실패한 삶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서 끊임없이 묻습니다.
“너희들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 있느냐?”
“진실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믿느냐?”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없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 너희는 저 어리석은 농부와 같다.”
그들이 보기에 우리의 삶은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농부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때가 되면 반드시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적인 눈으로만 보면 주님만큼 처절한 실패를 경험하신 분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실패를 넘어서 놀라운 성공이 올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그것을 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실패를 넘어서 희망을 품고 내게로 나아오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시간 그 주님께서 품으셨던 꿈,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꿈을 우리의 꿈으로 삼고 희망 안에서 용기를 내어 전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태복음강해(06.9.17-10.4.18) > 2008 년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8. 7. 6 / 말씀을 듣고서 / 마태복음 13:18-23 (0) | 2015.04.03 |
---|---|
2008. 6. 29 / 너희는 복이 있다 / 마태복음 13:10-17 (0) | 2015.04.03 |
2008. 6. 15 / 참된 가족 / 마태복음 12:46-50 (0) | 2015.04.03 |
2008. 6. 8 / 언제나 주님을 모시고 / 마태복음 12:43-45 (0) | 2015.04.03 |
2008. 6. 1 / 더 큰 이 / 마태복음 12:38-42 (0) | 2015.0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