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섬기는가?
마태복음 6장 19-24절/2007년 7월 29일
우선 이 시간을 빌어 고 배형규 목사님의 죽음에 대하여 진심으로 애도를 표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죽음에 대하여 슬픔을 금할 수 없고, 그 누구보다 슬픔에 젖어있을 유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멀리서나마 빕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는 이 시간 한 가지 물음을 지워버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스물 세 명의 인질을 잡아두고 있는 탈레반들이 도대체 왜 그중 한 사람을 죽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번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멀리는 아프카니스탄이라는 나라와 거기에 살고 있는 여러 민족들의 오랜 고난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가깝게는 소련의 침공으로 시작된 부족들 간의 투쟁이나 정치집단 사이의 대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아프카니스탄을 지배하고 있는 정부나 이번 인질사건을 일으킨 소위 탈레반 사이의 갈등 등을 복합적으로 보아야 왜 그들이 이런 일을 저질렀고, 심지어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는지 그 원인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여기서 다 이야기할 수 없기에 제켜 놓는다 하더라도 이번에 한국인들을 납치한 탈레반들은 과연 인질을 죽임으로써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할 것으로 믿고 있는 것인지 그것이 저로서는 참으로 궁금합니다.
전해지는 보도에 의하면 탈레반들이 원하는 조건이 무엇인지 헷갈리기도 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알기도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가장 중요하고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는 물론 남아 있는 스물 두 명의 인질들이 전원 무사히 살아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의료봉사, 교육봉사 등을 하러 갔던 분들이니까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살아서 돌아와야 합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 위험한 곳에 왜 갔느냐, 죽을 줄 뻔히 알고 간 것 아니냐 등등의 비난은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제 마음 속에 도저히 지워지지 않는 안타까운 생각이 한 가지 있습니다. 대규모 인질사태는 2007년 7월에 일어났지만 사실은 이번 사건이 일어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은 작년 여름 아프카니스탄에서 소위 대규모 평화행진을 벌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작년 여름,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일을 여러분이 모두 기억하시지요. 어느 선교단체에서 2,000명을 아프카니스탄으로 보내어 이슬람교도들인 그곳 사람들에게 예수 복음을 전하는 대규모 전도집회를 하려고 했던 사건이지요. 정부에서도 적극적으로 말리고, 또 여론도 좋지 않아서 결국 행사를 취소하기는 했지만 그 사건은 이슬람 사람들에게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극성맞게 복음을 전하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사건들이 이슬람권에 사는 사람들에게 한국 기독교인들에 대한 적대감을 심어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워버리기 어렵습니다.
결국 오늘날 한국교회의 근본문제는 무엇인가요? 왜 한국교회와 교인들이 그런 행사를 벌이지 못해서 안달을 부릴까요? 그것은 결국 국내에서든 국외에서든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신앙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국내에서도 어떤 방법으로든 건물을 크게 지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원하고, 선교를 할 때에도 국내선교든, 국외선교든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선교를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교회들이 국내나 외국에 교회를 개척한다든지 또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교회의 건물을 지어주게 되면 반드시 하는 일, 자기네 교회 이름을 따서 교회를 세우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상운수표교회라든지 태인수표교회 같은 것이 대표적인 경우이지요. 제 친구가 얼마 전에 담임목사로 내려간 무안광림교회도 그렇지요. 연회 주소록을 뒤져보니까 런던에는 ‘런던임마누엘교회’가 있고 미국에는 ‘시애틀금란교회’가 있더군요. 왜 이렇게 교회 이름을 붙일까요? 다들 자기네 교회 이름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지요. 이것 다 결국 자기과시요, 자기자랑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셨을까요?
여러분 아시는 대로 제가 안디옥선교회라는 곳에 속해서 작은 일을 하고 있지요. 그곳에서 중국인 신학생들을 교육시켜 중국 전국으로 보내어 교회를 개척하게 하고, 그래서 중국인들로 하여금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하는 것이지요. 물론 졸업생들 중에는 기존 교회에 들어가서 봉사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의 교회 개척이라는 것이 한국에서 하는 것과는 여러 가지로 상황이 다릅니다. 그런데 제가 듣기로는 한국교회의 많은 목사님들이 돈을 대 줄 테니까 건물 짓고 자기네 이름을 붙여서 교회를 세우자고 한다는 것이지요.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결국 오늘날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바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신앙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신앙행위는 결국 헛된 것임을 주님은 분명히 깨우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6장 1-18절까지의 말씀에서 유대인들이 행했던 세 가지 신심행위, 즉 자선과 기도와 금식 등이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고, 받아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기자는 유대인들의 신앙행위와 하나님과의 비교를 철저하게 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의 공통점은 바로 남들에게 보이려고 위선자들처럼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네 구절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1절) 너희는, 남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사람들 앞에서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2절)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5절)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아라.
16절) 너희는 금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슬픈 기색을 나타내지 말아라.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절에 의하면 그분은 하늘에 계신 분이십니다.
“너희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렇다면 하늘에 계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의 신비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인간의 언어로는 신의 존재를 나타낼 방법이 없고, 신이 사는 곳은 인간이 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옛날 사람들이 남긴 신화에 의하면 신들은 인간들이 사는 곳 가운데서 가장 높은 산의 꼭대기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하늘에 사는 분’으로밖에는 표현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을 문자대로만 해석해 버리면 참 답답한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하늘에 계시다“는 것은 인간의 영역, 인간의 차원을 초월해 계신 분, 따라서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분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은밀하게 계시는 분이시고, 은밀한 일을 보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4절) 이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은밀한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 아 주실 것이다.
6절)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은밀하게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 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18절) 그래서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지 말고, 보이지 않는 데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서 보시
게 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분!
소위 신앙이 좋다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쉽게 남들에게 보이는 행위의 유혹에 빠질까요? 왜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쉽게, 끊임없이 자기의 신앙을 남들에게 보이고자 애를 쓸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자기의 신앙을, 자선이나 기도나 금식 같은 신앙행위들을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알아주지 않으리라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사실은 철저한 불신앙 때문에 더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더 크게, 더 거룩하게, 더 화려하게 건물을 짓고, 의식을 거행하고, 행사를 치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자신이 없는 목사일수록 가운을 화려하게 걸치는 것입니다. 남들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을 것 같으니까 자꾸 화려한 가운을 걸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찍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나올 때였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서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했는지 아시지요. 그들은 아론에게 강력히 요구합니다.
“일어나서,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주십시오.” (출애굽기 32장 1절)
아론이 금고리들을 모아서 송아지상을 만들어내자 그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
(출애굽기 32장 4절)
그렇습니다.
이것은 바로 무언가 눈에 보이는 것이 있어야 믿는 신앙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은 불신앙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바로 불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건물은 크고 교인은 많지만 그 한국교회와 교인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사실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알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이고 그것은 다시 말하면 철저한 불신앙인 것입니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끊임없이 벌이는 것이 바로 대규모 행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대형건물을 짓고, 대규모 행사를 벌이고자 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재물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만큼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없습니다. 자선을 베풀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하고, 성전을 짓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하고, 선교사를 파송하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 특히 대형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요즘 헌금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헌금 종류를 한 번 꼽아 보시지요. 우리 교회는 주일헌금, 십일조헌금, 감사헌금, 선교헌금 네 가지이지요. 가끔 가다가 절기헌금을 하는데 우리는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 세 번 만 하지요. 언젠가 교단 출판국에서 맥추감사절 설교문을 보내달라고 요청이 왔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절기를 지키지 않기 때문에 보낼 설교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은혜와 진리 교회에서는 주일오전, 저녁, 수요일 등등 모일 때마다 헌금을 하라고 강요한다지요. 그래도 그 정도만 있다면 다행입니다. 직분을 맡으려면 특별헌금을 해야 되는 것 아시지요? 권사 되려면 얼마, 장로가 되려면 얼마 해서 헌금액수가 정해져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큰 교회에서는 돈이 많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한국교회가 왜 이렇게 헌금을 강조하고 돈을 밝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돈이 없으면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불신앙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믿는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 맘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런 교인들이 아무리 헌금을 많이 하고, 교회들이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철저하게 땅에다가 쌓아두는 행위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다가 쌓아두지 말아라. 땅에서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며,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간다. 그러므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어라. 거기에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는 일이 없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 가지도 못한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6장 19-21절)
자, 오늘의 본문에 관해서 말씀드리기 전에 미리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제가 아까 본문을 읽을 때 아마 문맥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낀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의 본문 구성에 관한 것입니다. 19-21절은 분명히 보물 즉 재물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24절은 하나님과 재물의 선택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24절 말씀은 21절에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느닷없이 ‘몸의 등불'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엉뚱한 이야기가 끼어 있습니다.
그리고 각 구절의 제목 옆에 나와 있는 누가복음 본문 표시를 보면 그것이 제각각 흩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마 6장 19-21절은 누가복음 12장 33-34절에 나오고, 마 6장 22-23절은 누가복음 11장 34-36절에 나옵니다. 또 마 6장 24절은 누가복음 16장 13절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병행구절들이 누가복음에도 나란히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르게 배치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복음 기자가 이 본문들에서 말하고 싶은 것이 마태복음과는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오늘의 본문을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22-23절의 말씀이 21절과 24절 사이에 들어와 있는 것으로 보아 마태복음 기자는 틀림없이 19-24절까지의 말씀 전체를 통해 재물에 관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설교의 본문을 19-24절까지로 묶은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오늘의 본문을 살펴보십시다.
자, 이제 주님께서는 재물을 땅에다가 쌓아 두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에서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며,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갑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쌓아두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좀이 먹거나 녹이 슬어서 망가지는 일이 없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가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재물을 하늘에 쌓아둔다는 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하늘에 은행이 있다는 말입니까? 하늘에 금고라도 있습니까? 유대교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을 종종 하나님께 맡긴 ‘투자’라고 가르쳤고, 또 예수님 자신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찾아왔던 부자 청년이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대답했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
(마가복음 9장 21절)
그렇습니다.
이렇게 보면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은 곧 자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자선의 문제를 짚었고 유대인들은 자선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많은 자선을 베푸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자선을 베푸는 것, 단순히 돈을 나누어 주는 차원의 것만으로 보기는 무언가 부족합니다. 따라서 19-21절 말씀의 핵심은 바로 21절입니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너희의 마음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삶의 근거를 재물에 두느냐, 하나님께 두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인생의 안전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입니다. 돈이 많으면 안전한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안전한 것이냐, 그것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제자는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니시기에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하면서 엉뚱한 길로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눈이 밝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마태복음 6장 22-23절)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온통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 위선으로만 가득 차 있다면 그런 사람은 완전한 어둠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아니라 돈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 사람은 완전한 어두움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자라면 완전한 어둠에 빠지지 않도록 올바르게 식별하는 것이 중요한 데 그것을 예수께서 한 마디로 표현하셨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여러분, 여기서 눈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는 안목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보통 어떤 사람이 자동차나 건물이나 주식 투자 등에 대해 보는 눈이 있다고 말할 때, 그런 사람의 시각에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빛이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주식이 2,000까지 올랐다가 1,800까지 떨어졌다고 난리입니다. 이런 와중에서도 돈을 버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고 하는데 그들은 주식에 대해서 보는 눈이 있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참된 빛을 보는 눈을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다름 아닌 “나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말씀하신 분에 의해 관통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 눈이 시력을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과적으로 초래되는 마음의 어둠은 절대적인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재물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는 상태에 빠지게 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결국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두 가지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주인이 되고자 하는 존재 둘이 있으니 하나님과 재물입니다. 사탄은 인간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 대신 섬길 첫 번째 것이 재물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사탄이 첫 번째로 던졌던 유혹이 바로 빵의 문제, 곧 재물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유혹을 이기셨던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마태복음 6장 24절)
자, 여러분!
두 가지 사이에서 선택보다 타협으로 마칠 수는 없는 것입니까? 어차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도 돈은 필요한 것인데 하나님과 돈 둘을 다 섬길 수는 없는 것인가요? 예수께서는 “안 된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재물 사이에 선택이 요구되는데, 여기 나오는 재물은 셈족의 용어로 맘몬(Mammon)으로 돈이나 부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원래 숭배의 대상을 칭하는 것이 아니라 ‘부유함’, ‘넉넉함’을 의미하는 것인데, 거기에는 인간이 우상시할 만한 힘이 있기에 대부분 대문자로 표현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결국 우리를 향해서 “무엇을 섬기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냐, 맘몬이냐? 여기에서 타협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이렇게 바뀔 것입니다.
“신앙이냐, 불신앙이냐?”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들, 한국교회의 책임입니다.
끝으로 오늘날 한국교회를 향하신 야고보서의 말씀을 한 구절 읽고 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가 쓴 말씀입니다.
“한국의 부자교회들은 들으십시오. 여러분에게 닥쳐올 비참한 일들을 생각하고 울며 부르짖으십시오. 여러분의 재물은 썩고, 여러분의 옷들은 좀먹었습니다. 여러분의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그 녹은 장차 여러분을 고발할 증거가 될 것이요, 불과 같이 여러분의 살을 먹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 마지막 날에도 재물을 쌓았습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일꾼들의 아우성소리가 전능하신 주님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여러분은 이 땅 위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으며, 살육의 날에 마음을 살찌게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지만, 그는 여러분에게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
'마태복음강해(06.9.17-10.4.18) > 2007 년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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