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 2. 18 / 기드온의 삼백 용사 / 사사기 6:36-7:8(기독교방송)
기드온의 삼백용사
사사기 6:36- 7:8 / 1995. 2. 18 (기독교 방송)
오늘도 이 방송을 들으시는 성도님들과 여러분의 가정위에, 그리고 섬기시는 교회 위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께로부터 소명을 받은 기드온이 제일 먼저 바알의 단을 헐어버리고 그 곁에 있던 아세라 목상을 찍어버렸다는 것, 그리고 그 터에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그곳에서 번제를 드렸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여호와의 신에 감동되어 기드온이 나팔을 불어 아비에셀 족속을 모으고 또 므낫세, 아셀, 스블론, 납달리 등의 지파에 보내어 군대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모습 등을 보았습니다.
이제 나팔 소리를 듣고 또 기드온이 보낸 사자들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들고 있는데 기드온은 또 다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마음에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우리와 같은 오합지졸이 미디안 족속, 아멜렉 족속 그리고 동방사람들의 동맹군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두려움도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제대로 훈련 한 번 받아보지 못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복전쟁을 일삼는 동맹군을 맞아 싸운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으며 또 그런 군대를 지휘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리고 이 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기드온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한 마디로 ‘표징'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모여든 군사들을 이끌고 싸움터로 나아갈 터인데 그전에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표징‘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기드온의 소명에 대한 기사 가운데 세 번째 단계입니다.
자, 이제 여기서 우리의 이야기를 더 진전시키기 전에 오늘의 상황을 다른 측면에서 들여다 봅시다. 분명히 6장 34절에 의하면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는 지난 주에 이 부분을 ‘기드온을 옷입혔다’라는 뜻으로 해석했고 이는 성령충만의 역사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절대 복종하게 된 기드온의 영적 상태를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도 성령충만했던 기드온이 어찌해서 그렇게 쉽게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는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기드온이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이라기보다는 기드온의 나팔 소리를 듣고 또 사자들의 메시지를 듣고 올라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막상 올라오기는 왔지만 과연 미디안 군대와 싸울 수 있는지, 하나님께서 과연 함께 하실 것인지 의심이 들었을 것이고 그들이 무언가 표징을 원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기드온이 표징을 원한 것은 자기의 믿음이 흔들려서라기보다는 군대로 모여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표징을 보여달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근거 중의 하나는 이 때 모였던 삼만 이천 명중에 ‘누구든지 두려워서 떠는 자가 있으면 돌아가라’는 말을 듣고 무려 이만 이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돌아갔다는 7장의 기록을 들 수 있습니다. 어쨌든 기드온은 전쟁에 앞서서 하나님께 구원의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조건도 자기가 내세웠습니다. 그는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펴두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만일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고 사면 땅은 말라서 뽀송뽀송하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 알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튿날 일어나자마자 마당으로 나갔더니 사면은 다 바짝 말라있는데 양털에만 이슬이 담뿍 먹어 있었습니다. 기드온이 그 양털의 물을 짰더니 그릇에 가득할 만큼 많이 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이면 충분할 터인데 기드온은 한 번 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한 번 봐서는 제 눈으로 본 것도 못 믿는 모양입니다. 이번에는 반대의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곧 이번에는 양털만 이슬이 내리지 않아 하얗게 마르고 양털이 덮히지 않은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번에도 하나님께서는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 이 장면에서 우리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을 갖고 하나님 앞에서 떼를 쓰고 있는 인간의 모습과 끝까지 참으시고 끝내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비교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어쩌면 이 장면은 오늘 우리의 신앙 모습을 그대로 옮겨서 묘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자, 이제 드디어 결전의 날은 밝았습니다. 이스라엘과 미디안 사이에 두 민족의 운명을 건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여룹바알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기드온이 거느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롯샘 곁에 진을 쳤고 미디안의 진은 그들의 북편인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있었습니다. 이 때 모인 양편의 군대 수는 이스라엘족이 3만 2천명이었던 데 비해 미디안 사람들과 아멜렉 사람들과 동방의 민족들을 모은 동맹군은 12절에 “메뚜기의 중다함 같고”라고 표현될 만큼 엄청난 수였습니다. 그 동맹군의 수가 얼마나 되는 지는 8장 10절에 나오는데 동방사람의 군대 중에 칼든자 12만 명이 죽었고 남은 사람이 일만 오천 명 가량이라고 했으니 합하면 무려 13만 2천명이나 되는 대군이었습니다. 그러니까 3만 2천 명 대 13만 5천 명이면 적군이 무려 4배가 넘고 따라서 숫자로만 보면 이스라엘 군대가 훨씬 불리해 보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느닷없이 기드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쫓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본성을 너무나 정확히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역사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막상 구원받고 난 후에는 그것이 자기들의 힘으로 되었다고 자랑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고 기도하다가도 그것을 벗어나고 일이 잘 되면 곧 내가 잘 나서 잘 되었다고 교만해지는 일이 너무나 많음을 하나님께서 잘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모세는 신명기 8장 17절에서 “
또 두렵건데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하고 염려하고 있으며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장 26-29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3만 2천명의 군대가 너무 많다고 하시면서 기드온으로 하여금 두려워서 떠는 자는 지금이라도 돌아가라고 명령하게 합니다. 모레 산 앞 골짜기를 새까맣게 뒤덮고 있는 미디안 군대를 보기만 해도 벌벌 떨던 이스라엘 군대들은 돌아가도 좋다는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2만 2천명이 떠나가고 불과 1만 명만 남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돌아간 사람이 전체의 2/3이나 되는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20장을 보면 어떤 사람들이 군대 징집을 면제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과 전쟁할 때의 유의 사항 등이 나와 있는데 그 중 8절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유사들은 오히려 또 백성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두려워서 마음에 겁내는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그 형제들의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이 떨어질까 하노라.”
그렇습니다. 어떤 일을 앞에 놓고 두려움에 떠는 사람은 본인만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두려움을 전파시켜 공동체를 약화시킬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들을 추려내셨습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서 신앙적으로 결단해야 하는 일을 앞에 놓고 있으면서 두려움에 사로잡혀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 1만명이 남았습니다. 1만명이면 적군의 1/13이니까 너무나 적은 수입니다. 이것보다 더 적은 수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어 보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고 해도 군대가 1만명은 되어야 작전을 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적어도 남은 1만명은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이니까 그들의 힘으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이 때 또 다시 하나님의 명령이 내려옵니다. “여호와께서 또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물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 무릇 내가 누구를 가리켜 이르기를 이가 너와 함께 가리라 하면 그는 너와 함께 갈 것이요 내가 누구를 가리켜 이르기를 이는 너와 함께 가지 말 것이니라 하면 그는 가지 말 것이니라 하신지라.”
두려워 떠는 자들 2만 2천 명이 돌아가고 남은 자들을 놓고 하나님께서 다시 시험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험을 통과하는 자라야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의 뜻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을 때 돌아간 사람들을 빼고 남은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택해야 될 때가 온 것입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1장 25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또 나의 손을 네게 돌려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너의 혼잡물을 제하여 버릴” 때가 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더 큰 성취를 이룩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우리가 넘어야 할 시험의 용광로는 더 뜨겁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채로 걸러내지도 않으시고 크게 들어 쓰신 인물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요셉, 모세, 다니엘, 베드로 등등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시험을 잘 이겨내었던 인물들이었던 것입니다.
자, 오늘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던 시험의 방법은 무엇이었던가요? 기드온은 남아있던 이스라엘 백성 1만 명을 물가로 데려가서 물을 먹게 했습니다. 운명의 시간을 앞에 놓고 긴장도 되었을 것이고 목이 타기도 했을 테니까 그들은 일제히 물가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물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이 때 물 마시는 모습이 두 가지로 확연히 갈라졌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손에 쥐었던 무기 따위를 다 땅에 내려놓고는 무릎을 꿇고 입으로 물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유난히 한 쪽 무릎만 꿇고 다른 한 쪽 무릎을 세우고 또 한 손으로는 무기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물을 떠서 마치 개가 물을 핥아 먹는 것처럼 핥아 먹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기드온이 그 두 종류의 사람들을 구분해서 세워 보니까 두 무릎을 꿇고 물을 먹는 사람의 수가 9천 7백 명이었고 나머지는 겨우 3백 명에 불과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 먹은 3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여 미디안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그 처소로 돌아갈지니라.”
자, 여러분!
지금 1만 명이 물을 먹고 있는 것이 어떤 상황입니까? 앞에는 13만 5천명의 적군이 칼을 겨누고 있고 그래서 이제 곧 날이 밝으면 전투가 벌어질 급박한 상황입니다. 마치 폭풍전야와도 같은 긴장감이 감도는 그 밤에 물을 먹으러 갔는데 대부분의 삶들은 그만 목이 마르다고 해서 전쟁터에서는 목숨보다 귀하다고 하는 무기도 내려놓고 꿇어앉아서 물을 마셨고 불과 3백 명만 적군의 동태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손으로 물을 떠서 먹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손으로 물을 떠서 핥아 먹은 사람들은 상황이 얼마나 급박하고 중요한가를 잘 깨닫는 즉, 명석한 상황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무릎을 꿇고 천천히 자기만 배부르게 물을 마시겠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만족만 구하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개인적인 안락을 제일의 목표로 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합당치 못한 사람입니다. 물론 당시 모든 사람들이 전부 목이 말랐으며, 그래서 물이 너무도 중요했습니다마는 그러나 그들은 적어도 지금 그곳에 왜 모여 있는지는 잊어버리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적어도 물 마시러 온 것이 목적이 아니고 적군을 물리치기 위해서 온 것이 목적이라면 아무리 물을 마실 때라도 적군의 동태를 살피고 주의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신앙생활을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군병으로 부름을 받았고 따라서 늘 깨어 기도하며 전진해야지 내 일신의 안일만을 추구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울리는 적어도 단순히 보다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하여 하나님의 군병으로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끝으로 우리는 누구에게 또한 무엇에게 무릎을 꿇고 사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고 싶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폭력조직들을 보면 두 사람이 싸우다가 한 사람이 다른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복종한다고 약속하면 그 두사람의 관계는 두목과 부하로서 성립됩니다. 두목은 부하를 보살펴 주고 부하는 두목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에게 절대적인 힘으로 보이는 것 앞에 무릎을 꿇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일 수도 있고, 돈일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고, 주먹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은 세상의 그 어느 것도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앞에만 무릎을 꿇는 사람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인간이 만들어낸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주인이시고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인도자이심을 따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택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시간 하롯샘 곁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눈에 보이십니까? 허겁지겁 물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 또 그 틈에 끼어 조심스럽게 물을 먹고 있는 사람들. 그들의 모습이 구분되어 보이십니까? 그리고 동시에 지금 우리가 어떤 자세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바라보고 계실 하나님을 기억하십니까?
이 방송을 들으시는 여러분 모두 믿음의 시험에 합격하여 하나님의 용사로 인정받는 귀한 은총이 늘 가득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