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년도
1984. 9. 30 / 미래는 있는가? / 마가복음 10:17-22, 요한복음 1:35-42
람보 2
2015. 3. 5. 17:39
미래는 있는가?
마가복음 10: 17-22, 요한복음 1: 35-42 / 1984. 9. 30
저는 오늘 성서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두 사람의 젊은이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 사람은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고, 한 사람은 이름이 알려져 있습니다. 한 사람은 관원 또는 의회 의원으로 알려져 있고 다른 한 사람은 고기 잡는 어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 사람은 재산이 아주 많은 부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가진 것이라고는 별로 없어 보이는 그래서 고기를 잡아야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한 사람은 율법을 철저하게 잘 지켰다고, 모든 계명을 완전히 지켰노라고 자신만만해 하는 것으로 보아 바리새파에 속하는 사람인 것 같고, 다른 한 사람은 일찍이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번째 사람, 그는 바로 제가 지난번 설교에서 소개했던 그 부자 청년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예수의 열두 제자중의 한 사람인 안드레입니다. 저는 그 두 사람에게서 아주 중요한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바로 두 사람 다 예수에게서 무엇인가를 찾고자 기대하면서 예수를 만나보러 왔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은 씁쓸해하는 표정으로 슬퍼하며 예수의 곁을 떠나갔고, 다른 한 사람은 예수를 스승으로 모시고 3년간 따라다녔고, 끝내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평생을 살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안드레 행전이라고 하는 신약 외경에 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안드레는 그리스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X자로 매달려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부자 청년은 자기의 남은 여생을 그 많은 재산가지고 별 걱정 없이 살았을 것이고, 안드레는 힘들고 고생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가 영생의 길로 갔을까를 우리는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두 사람의 차이점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그 차이는 생겨났는가요?
오늘의 주인공인 부자 청년과 안드레, 그 두 사람은 우선 어떤 시대를 살고 있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1900년 전인 기원 1세기 초반, 지중해를 중심으로 온 세계를 지배한 나라는 로마였습니다. 조그마한 도시국가 로마를 세계 제국 로마로 키운 그 유명한 황제 옥타비아누스, 일명 아우구스투스는 주후 14년 8월 19일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의붓아들 티베리우스가 황제의 뒤를 이었습니다. 로마는 평화를 유지했고 황제는 신으로 숭배 받는 시절이었습니다.
이때 지중해의 동쪽 한 구석 갈릴리와 유다 지방에는 로마 황제의 충실한 신하인 헤롯 대왕이 폭군으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37년에 왕으로 임명된 그는 천력을 유지하기 위해 처처에 스파이를 파견하고 비밀 정보망을 설치하여 주민들을 의심하고 감시했으며, 조금이라도 수상하다고 느껴지면 붙잡아다가 감옥에 집어넣고 그리고는 죽여 버렸습니다.
심지어 자기의 자녀들과 부인까지도 의심하고 죽여 버렸기에 로마의 황제까지도 “헤롯의 아들이 되기보다는 헤롯의 돼지가 되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말로 헤롯의 병적인 권력욕을 비꼬았던 것입니다.
헤롯은 철저하게 로마의 비호아래 정치권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유대인들에게서 미움을 받아왔고 더욱이 그는 순수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의 혼혈족이었기에 유대인들은 그를 더욱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민심을 얻지 못한 헤롯은 유대인의 성전을 사치스럽게 재건해 줌으로써 대중의 인기를 얻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종교가 정치에 관여하는 일은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고, 선지자라고 불리어지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조사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선지자의 메시지가 비정치적일 때에는 그냥 두지만 만일 그가 주장하는 것이 정치적인 암시를 내포하기만 하면 그를 효과적으로 침묵하게 만들던지, 때에 따라서는 가차없이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민중에 의해 메시아라고 여겨지는 사람은 즉시 제거되었던 것입니다.
기원전 4년경 헤롯이 죽자 로마는 팔레스틴 지방을 넷으로 나누어 분할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그 중 사마리아와 유다와 예루살렘과 에돔 지방은 아켈라오스가 다스리다가 기원후 4년 로마 총독의 직할지로 편입되었고, 갈릴리와 유다 동쪽 일부 지방은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 기원 후 39년까지 통치되었습니다.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부자 청년과 안드레가 예수님을 만날 당시 갈릴리의 지배자는 바로 헤롯 안티파스인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권력을 쥐고 부귀영화를 누리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에 의해 임명된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한 몇몇 사제계급과 70명의 산헤드린 의원들, 헤롯 주변의 관리들 또는 누가복음 12:16 이하에 나오는 대토지 소유자들이나 야고보서 4: 13-17에 나오는 상인들, 또는 삭개오같은 세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돈이 있었고, 그래서 비록 식민지 생활이기는 했지만 조금도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온 부자 청년, 그도 관원 또는 의회원이고 부자인 것으로 보아 바로 이 계층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시대에 특권층에 속했던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사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마디로 극도의 물질주의, 헬라의 쾌락주의입니다. 헤롯 대왕과 헤롯 안티파스, 그들은 백성들의 관심과 인기를 끌기 위해 수많은 기념물을 세우고 활발한 공공사업을 일으키고, 갖가지 성대한 축제를 끊임없이 거행하였습니다. 심지어 수많은 뇌물을 바치고 대제사장에 임명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운동과 놀이를 위한 운동장을 건설하여 헬라의 운동경기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부유하고 향락적인 도시의 청년들은 넓은 테로 된 모자를 쓰고 10대들이 우굴거리는 경기장으로 모여들었고 사제들도 제단에서의 직무를 등한히 한 채 경기장으로 달려가 투원반 연습을 했고, 상을 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헬라의 운동경기는 알몸으로 하는 것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할례의 흔적을 보이지 않게 하려고 수술을 받기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부자 청년이 속해 있는 유대의 특권층에 널리 퍼져있던 이 모든 일, 여기에서 하나의 문제점을 발견하시는가요? 그들이 헬라 문화에 마음을 빼앗길 때 그들이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있음을 발견하시는가요?
그들이 잃어버린 것,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무슨 약속인가요?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하신 약속, 모세를 통해 히브리인들을 애굽에서 구해내시고 하신 약속, 여호수아를 통해, 사사들을 통해 보여주신 약속.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선지자들을 보내어 해 주신 약속. 바로 메시야가 올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8:14에서 선포한 대로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이라 불리우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 분이 오실 것이라는 약속을 부자 청년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예수를 만나서는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지, 주님이라고는 고백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를 찾아와서도 자기의 힘으로 구원을 얻으려 했지, 예수를 향해서는 그의 마음을 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삶이 미래에 어떻게 될까 걱정은 했지만 참된 미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영접하지 못했기에 그는 슬퍼하며 돌아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부자 청년이 그 후에 얼마만큼 더 살았는지, 무엇을 갖고 얼마나 떵떵거리며 살았는지, 마음속에 아무 걱정이 없었는지 혹은 슬픔이 그대로 남아 평생을 근심 속에 살았는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 한 가지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말씀을 거부하고 돌아선 순간 그는 죽은 것이며 그에게는 미래는 없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에게만 관심이 있을 때 그것은 곧 죽음인 것입니다.
우리의 첫번째 주인공, 비극으로 끝난 주인공 부자 청년, 그의 활동 무대가 도시였다면 성서는 우리에게 또 다른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것은 광야입니다.
광야, 정확히 표현해서 나무와 갈대와 키 작은 나무들을 휘몰아치는 바람부는 곳, 요르단 초원의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 산화된 해골바가지와 같은 민둥산이 지평선에 이어지고, 생명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갈색 빛깔의 땅이 사해에까지 이르는 곳, 광야.
이 유대의 광야, 불안과 공포의 지역이면서 동시에 신을 생각하고, 고독에 잠기며, 명상을 하던 곳, 광야. 이 신비에 찬 무인의 땅. 일찍이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광야생활을 회상하면서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가서 예루살렘 거민의 귀에 외쳐 말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소년 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좇았음을 내가 너를 위하여 기억하노라’ “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표적과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했으며,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구리 뱀을 만들게 하고 하늘의 떡을 내리게 했으며, 광야에서 거듭거듭 특별한 방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신비의 땅 광야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 최종적인 것이 생길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메시야가 등장하기를 기대했고, 그가 기적의 힘으로 원수를 섬멸하고,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줄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께서 사시던 때를 전후한 1세기에 걸쳐서 많은 사람들이 메시야로 자처하고 광야를 통해 등장합니다. 사도행전 5:36에도 언급된 마술사 “드다”라든가 요나단이라는 직물업자, 시카리 라고 불리우는 자객들이나 또 다른 예언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실패자들이었고, 무력으로 메시야 운동을 일으켰다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그 때 홀연히 광야에 나타난 인물 세례요한, 그는 다른 메시야 운동가들하고는 달랐습니다. 대부분의 메시야 운동가들이 사회질서를 뒤집어엎기를 바랐지만 세례요한은 오히려 인간의 뒤집힘을 외쳤습니다. 그래서 그의 첫 번째 메시지는 “회개하라”입니다.
“회개하라” 그 말은 바로 일찍이 하나님께서 보내기로 약속하신 메시야를 겸손히 기다리라는 말입니다.
“회개하라” 그 말은 부자 청년처럼, 돼지처럼 저 먹고 살 궁리, 제 혼자 배부르게 떵떵거리고 살 궁리만 하지 말고 어려운 이웃을 향해 관심을 돌리라는 말입니다.
“회개하라” 그 말은 우리의 모든 가능성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음을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두번째 주인공 안드레, 그가 왜 세례요한을 찾아갔고, 그의 제자가 되었는가요?
안드레, 그는 헤롯의 폭정 하에서 신음하는 동족의 아픔을 기억했습니다.
안드레, 그는 경제적으로 한없이 빼앗기고, 굶주리는 동족의 배고픔을 기억했습니다.
안드레, 그는 아무 희망이 없어 보이는, 너무나 암담하기에 별들이 사라진 암흑과 같은 현실 속에서 메시야의 빛줄기를 기억한 사람입니다.
안드레, 그는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 속에서 이웃을 기억하고, 메시야의 음성을 듣고 전해주기를 간절히 소원한 사람입니다.
안드레, 그는 순수했고, 이웃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열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안드레, 그는 결국 한마디로 미래에 산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세례 요한의 음성에서 하나님을 선포하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었고, 세례요한은 안드레에게 바로 메시아이신 예수를 소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두번째 본문인 요한복음 1:38에 보면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하고 되어 있습니다. 안드레가 예수께 물은 말 “어디 계시오니이까?”는 단순히 사는 집이 어디인가를 묻는 말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 말은 바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말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그 의미를 아시고 안드레에게 “와보라”고 말씀하시고 함께 지내시게 됩니다. 그리고 안드레는 예수와의 대화를 통해 그를 메시아로 확신하게 되고 곧 자기의 형인 베드로에게 예수를 메시아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부자 청년과 안드레의 차이점을 발견했습니다. 부자 청년, 그는 예수를 하나의 선생으로만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예수께서 메시아이심을 발견하고 그 분께 자기의 인생을 걸게 됩니다. 여기에서 부자 청년의 미래는 사라졌고, 안드레의 미래는 생명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뒤를 이어 자라가는 젊은이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붙잡고 고민하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뜨거운 열정을 갖고 살아간다면,
우리와 더불어 사는 이웃들에게 예수가 참된 메시아임을 증거하고자 애쓴다면, 어떻게든 나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우리 모두가 함께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고 하는 꿈을 갖고 살아간다면,
이 나라의 살 길은 경제개발이나 핵무기 개발이나 외교 발전이나 올림픽 개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믿고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젊은이들과 함께 하실 것이고,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는 열릴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나이가 몇 살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 한 가지는 바로 내가, 우리가 나와 우리의 미래를 하나님께 거는가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건 것을 구체적으로 이웃을 위한 삶으로 표현하는가 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미래를 약속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안드레와 같이 살려고 애쓰는 우리의 젊은이들과 함께 하시고 우리의 미래도 열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마가복음 10: 17-22, 요한복음 1: 35-42 / 1984. 9. 30
저는 오늘 성서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두 사람의 젊은이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 사람은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고, 한 사람은 이름이 알려져 있습니다. 한 사람은 관원 또는 의회 의원으로 알려져 있고 다른 한 사람은 고기 잡는 어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 사람은 재산이 아주 많은 부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가진 것이라고는 별로 없어 보이는 그래서 고기를 잡아야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한 사람은 율법을 철저하게 잘 지켰다고, 모든 계명을 완전히 지켰노라고 자신만만해 하는 것으로 보아 바리새파에 속하는 사람인 것 같고, 다른 한 사람은 일찍이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번째 사람, 그는 바로 제가 지난번 설교에서 소개했던 그 부자 청년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예수의 열두 제자중의 한 사람인 안드레입니다. 저는 그 두 사람에게서 아주 중요한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바로 두 사람 다 예수에게서 무엇인가를 찾고자 기대하면서 예수를 만나보러 왔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은 씁쓸해하는 표정으로 슬퍼하며 예수의 곁을 떠나갔고, 다른 한 사람은 예수를 스승으로 모시고 3년간 따라다녔고, 끝내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평생을 살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안드레 행전이라고 하는 신약 외경에 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안드레는 그리스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X자로 매달려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부자 청년은 자기의 남은 여생을 그 많은 재산가지고 별 걱정 없이 살았을 것이고, 안드레는 힘들고 고생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가 영생의 길로 갔을까를 우리는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두 사람의 차이점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그 차이는 생겨났는가요?
오늘의 주인공인 부자 청년과 안드레, 그 두 사람은 우선 어떤 시대를 살고 있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1900년 전인 기원 1세기 초반, 지중해를 중심으로 온 세계를 지배한 나라는 로마였습니다. 조그마한 도시국가 로마를 세계 제국 로마로 키운 그 유명한 황제 옥타비아누스, 일명 아우구스투스는 주후 14년 8월 19일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의붓아들 티베리우스가 황제의 뒤를 이었습니다. 로마는 평화를 유지했고 황제는 신으로 숭배 받는 시절이었습니다.
이때 지중해의 동쪽 한 구석 갈릴리와 유다 지방에는 로마 황제의 충실한 신하인 헤롯 대왕이 폭군으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37년에 왕으로 임명된 그는 천력을 유지하기 위해 처처에 스파이를 파견하고 비밀 정보망을 설치하여 주민들을 의심하고 감시했으며, 조금이라도 수상하다고 느껴지면 붙잡아다가 감옥에 집어넣고 그리고는 죽여 버렸습니다.
심지어 자기의 자녀들과 부인까지도 의심하고 죽여 버렸기에 로마의 황제까지도 “헤롯의 아들이 되기보다는 헤롯의 돼지가 되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말로 헤롯의 병적인 권력욕을 비꼬았던 것입니다.
헤롯은 철저하게 로마의 비호아래 정치권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유대인들에게서 미움을 받아왔고 더욱이 그는 순수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의 혼혈족이었기에 유대인들은 그를 더욱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민심을 얻지 못한 헤롯은 유대인의 성전을 사치스럽게 재건해 줌으로써 대중의 인기를 얻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종교가 정치에 관여하는 일은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고, 선지자라고 불리어지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조사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선지자의 메시지가 비정치적일 때에는 그냥 두지만 만일 그가 주장하는 것이 정치적인 암시를 내포하기만 하면 그를 효과적으로 침묵하게 만들던지, 때에 따라서는 가차없이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민중에 의해 메시아라고 여겨지는 사람은 즉시 제거되었던 것입니다.
기원전 4년경 헤롯이 죽자 로마는 팔레스틴 지방을 넷으로 나누어 분할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그 중 사마리아와 유다와 예루살렘과 에돔 지방은 아켈라오스가 다스리다가 기원후 4년 로마 총독의 직할지로 편입되었고, 갈릴리와 유다 동쪽 일부 지방은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 기원 후 39년까지 통치되었습니다.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부자 청년과 안드레가 예수님을 만날 당시 갈릴리의 지배자는 바로 헤롯 안티파스인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권력을 쥐고 부귀영화를 누리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에 의해 임명된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한 몇몇 사제계급과 70명의 산헤드린 의원들, 헤롯 주변의 관리들 또는 누가복음 12:16 이하에 나오는 대토지 소유자들이나 야고보서 4: 13-17에 나오는 상인들, 또는 삭개오같은 세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돈이 있었고, 그래서 비록 식민지 생활이기는 했지만 조금도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온 부자 청년, 그도 관원 또는 의회원이고 부자인 것으로 보아 바로 이 계층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시대에 특권층에 속했던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사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마디로 극도의 물질주의, 헬라의 쾌락주의입니다. 헤롯 대왕과 헤롯 안티파스, 그들은 백성들의 관심과 인기를 끌기 위해 수많은 기념물을 세우고 활발한 공공사업을 일으키고, 갖가지 성대한 축제를 끊임없이 거행하였습니다. 심지어 수많은 뇌물을 바치고 대제사장에 임명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운동과 놀이를 위한 운동장을 건설하여 헬라의 운동경기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부유하고 향락적인 도시의 청년들은 넓은 테로 된 모자를 쓰고 10대들이 우굴거리는 경기장으로 모여들었고 사제들도 제단에서의 직무를 등한히 한 채 경기장으로 달려가 투원반 연습을 했고, 상을 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헬라의 운동경기는 알몸으로 하는 것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할례의 흔적을 보이지 않게 하려고 수술을 받기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부자 청년이 속해 있는 유대의 특권층에 널리 퍼져있던 이 모든 일, 여기에서 하나의 문제점을 발견하시는가요? 그들이 헬라 문화에 마음을 빼앗길 때 그들이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있음을 발견하시는가요?
그들이 잃어버린 것,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무슨 약속인가요?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하신 약속, 모세를 통해 히브리인들을 애굽에서 구해내시고 하신 약속, 여호수아를 통해, 사사들을 통해 보여주신 약속.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선지자들을 보내어 해 주신 약속. 바로 메시야가 올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8:14에서 선포한 대로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이라 불리우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 분이 오실 것이라는 약속을 부자 청년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예수를 만나서는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지, 주님이라고는 고백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를 찾아와서도 자기의 힘으로 구원을 얻으려 했지, 예수를 향해서는 그의 마음을 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삶이 미래에 어떻게 될까 걱정은 했지만 참된 미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영접하지 못했기에 그는 슬퍼하며 돌아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부자 청년이 그 후에 얼마만큼 더 살았는지, 무엇을 갖고 얼마나 떵떵거리며 살았는지, 마음속에 아무 걱정이 없었는지 혹은 슬픔이 그대로 남아 평생을 근심 속에 살았는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 한 가지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말씀을 거부하고 돌아선 순간 그는 죽은 것이며 그에게는 미래는 없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에게만 관심이 있을 때 그것은 곧 죽음인 것입니다.
우리의 첫번째 주인공, 비극으로 끝난 주인공 부자 청년, 그의 활동 무대가 도시였다면 성서는 우리에게 또 다른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것은 광야입니다.
광야, 정확히 표현해서 나무와 갈대와 키 작은 나무들을 휘몰아치는 바람부는 곳, 요르단 초원의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 산화된 해골바가지와 같은 민둥산이 지평선에 이어지고, 생명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갈색 빛깔의 땅이 사해에까지 이르는 곳, 광야.
이 유대의 광야, 불안과 공포의 지역이면서 동시에 신을 생각하고, 고독에 잠기며, 명상을 하던 곳, 광야. 이 신비에 찬 무인의 땅. 일찍이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광야생활을 회상하면서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가서 예루살렘 거민의 귀에 외쳐 말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소년 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좇았음을 내가 너를 위하여 기억하노라’ “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표적과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했으며,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구리 뱀을 만들게 하고 하늘의 떡을 내리게 했으며, 광야에서 거듭거듭 특별한 방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신비의 땅 광야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 최종적인 것이 생길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메시야가 등장하기를 기대했고, 그가 기적의 힘으로 원수를 섬멸하고,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줄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께서 사시던 때를 전후한 1세기에 걸쳐서 많은 사람들이 메시야로 자처하고 광야를 통해 등장합니다. 사도행전 5:36에도 언급된 마술사 “드다”라든가 요나단이라는 직물업자, 시카리 라고 불리우는 자객들이나 또 다른 예언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실패자들이었고, 무력으로 메시야 운동을 일으켰다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그 때 홀연히 광야에 나타난 인물 세례요한, 그는 다른 메시야 운동가들하고는 달랐습니다. 대부분의 메시야 운동가들이 사회질서를 뒤집어엎기를 바랐지만 세례요한은 오히려 인간의 뒤집힘을 외쳤습니다. 그래서 그의 첫 번째 메시지는 “회개하라”입니다.
“회개하라” 그 말은 바로 일찍이 하나님께서 보내기로 약속하신 메시야를 겸손히 기다리라는 말입니다.
“회개하라” 그 말은 부자 청년처럼, 돼지처럼 저 먹고 살 궁리, 제 혼자 배부르게 떵떵거리고 살 궁리만 하지 말고 어려운 이웃을 향해 관심을 돌리라는 말입니다.
“회개하라” 그 말은 우리의 모든 가능성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음을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두번째 주인공 안드레, 그가 왜 세례요한을 찾아갔고, 그의 제자가 되었는가요?
안드레, 그는 헤롯의 폭정 하에서 신음하는 동족의 아픔을 기억했습니다.
안드레, 그는 경제적으로 한없이 빼앗기고, 굶주리는 동족의 배고픔을 기억했습니다.
안드레, 그는 아무 희망이 없어 보이는, 너무나 암담하기에 별들이 사라진 암흑과 같은 현실 속에서 메시야의 빛줄기를 기억한 사람입니다.
안드레, 그는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 속에서 이웃을 기억하고, 메시야의 음성을 듣고 전해주기를 간절히 소원한 사람입니다.
안드레, 그는 순수했고, 이웃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열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안드레, 그는 결국 한마디로 미래에 산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세례 요한의 음성에서 하나님을 선포하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었고, 세례요한은 안드레에게 바로 메시아이신 예수를 소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두번째 본문인 요한복음 1:38에 보면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하고 되어 있습니다. 안드레가 예수께 물은 말 “어디 계시오니이까?”는 단순히 사는 집이 어디인가를 묻는 말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 말은 바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말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그 의미를 아시고 안드레에게 “와보라”고 말씀하시고 함께 지내시게 됩니다. 그리고 안드레는 예수와의 대화를 통해 그를 메시아로 확신하게 되고 곧 자기의 형인 베드로에게 예수를 메시아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부자 청년과 안드레의 차이점을 발견했습니다. 부자 청년, 그는 예수를 하나의 선생으로만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예수께서 메시아이심을 발견하고 그 분께 자기의 인생을 걸게 됩니다. 여기에서 부자 청년의 미래는 사라졌고, 안드레의 미래는 생명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뒤를 이어 자라가는 젊은이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붙잡고 고민하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뜨거운 열정을 갖고 살아간다면,
우리와 더불어 사는 이웃들에게 예수가 참된 메시아임을 증거하고자 애쓴다면, 어떻게든 나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우리 모두가 함께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고 하는 꿈을 갖고 살아간다면,
이 나라의 살 길은 경제개발이나 핵무기 개발이나 외교 발전이나 올림픽 개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믿고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젊은이들과 함께 하실 것이고,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는 열릴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나이가 몇 살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 한 가지는 바로 내가, 우리가 나와 우리의 미래를 하나님께 거는가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건 것을 구체적으로 이웃을 위한 삶으로 표현하는가 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미래를 약속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안드레와 같이 살려고 애쓰는 우리의 젊은이들과 함께 하시고 우리의 미래도 열어주실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