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년도

1984. 9. 2 / 내가 대신 하리라 / 창세기 44:25-34

람보 2 2015. 3. 5. 17:34

내가 대신 하리라 (1984. 9. 2 )

내가 대신 하리라

창세기 44:25-34 / 1984. 9. 2

오늘 읽어주신 본문 말씀은 44장 18절부터 시작되는 유다의 연설 뒷부분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읽어보시면 금방 아시겠지만 야곱의 넷째 아들인 이 유다의 연설은 야곱과 그의 열 두 아들사이에 얽힌 복잡한 집안이야기가 요약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시간 야곱과 그의 아들 요셉, 그리고 요셉의 형제들, 특히 그 중에서도 유다에 관한 것을 살펴보면서 선교 100주년을 맞이하고, 갖가지 기념행사를 치루어 나가는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고자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떠받드는 아브라함의 자녀가 몇 명인지 아십니까? 유 초등부 아이들이나 중고등부 학생들이 율동하면서 부르는 노래에 나오는 대로 일곱 명인가요? 아니면 이삭과 이스마엘 단 두 명인가요? 아닙니다. 모두 여덟 명입니다.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 사라가 낳은 이삭, 그리고 창세기 25장에 나오는대로 그두라가 낳은 아들들 시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 이렇게 모두 합해서 여덟 명입니다. 그러니 그 집안이 얼마나 복잡했겠습니까? 물론 그 중에서 아브라함의 대를 이은 사람은 이삭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믿음의 조상들 가운데 가장 적게 취급되고 있고 어찌보면 아브라함과 야곱을 잇는 다리 역할만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 그 중에 아버지의 뒤를 이은 사람은 형이 아니라 동생 야곱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어떤 사람입니까? 아주 약아빠진 사람이 아닙니까? 얌전한 척 하면서 제 잇속만 차리는 사람, 남의 약점을 이용해서 축복을 독차지하려는 사람, 자기의 하나 밖에 없는 형의 어리숙함을 이용해서 축복을 가로채고, 심지어 아버지까지 속여 저만 잘되면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부인은 넷씩이나 두고 아들만 열둘을 낳은 욕심쟁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복잡한 내력을 가진 집안, 그것이 바로 성서에 나타나는 믿음의 조상들의 집안입니다. 거기에는 끊임없이 갈등이 생기고, 시기와 질투가 뒤엉킵니다. 여자들끼리 싸우고 형과 동생이 싸우고, 자식을 내쫒고 하는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성서를 기록한 기자들이 자기네 조상들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나도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다 기록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것이 하나도 없으며, 진실은 꼭 기록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온 이래 잘한 것도 많이 있지만 잘못된 것, 특별히 감투싸움으로 인한 교파의 분열과 다른 사람을 너무나 쉽게 정죄하는 잘못은 하나님 앞에서 분명히 드러날 것이며, 우리의 다음 세대들을 위해서도 기록되어야 함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라함 집안의 복잡한 이야기 가운데서 아마 야곱의 열 두 아들 이야기만큼 복잡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제 그 복잡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서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한 인물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의 이름은 유다입니다.

유다는 야곱의 네 번째 아들이고 어머니는 레아입니다. 그런데 레아는 처음부터 야곱의 마음에 들었던 여자는 아닙니다. 야곱이 형 에서에게 쫓겨 어머니의 고향에 갔을 때 사실은 레아의 동생 라헬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7년 동안이나 일을 해주고 라헬과 결혼하려고 했지만 외삼촌에게 속아서 얻은 여인이 레아입니다. 그런 여자에게서 태어났으니까, 그리고 또 넷째이기도 하니까 특별히 귀여움을 받았을 것 같지 않습니다.

넷째아들 유다, 그는 다른 형제들과 함께 양을 치는 목자였습니다. 낮에는 내려쬐는 태양 아래서 양떼를 돌보아야 했고, 밤에는 추위에 떨면서 양떼를 지켜야했습니다. 따뜻한 집이 그리웠을 것이고, 편하게 잠자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들판에서 양을 지켜야 했습니다.

이 때 기분 나쁜 일이 생겼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동생 요셉에게만 특별히 사랑하는 뜻으로 채색 옷을 해 입힌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요셉은 무슨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부모님과 형들이 자기 앞에서 머리를 숙일 것이라고 떠들었습니다. 그러니 누가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그런 말을 듣는다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형들이 화를 낸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마침 요셉이 광야로 오게 되자 형들은 요셉을 잡아 죽이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시기와 질투, 그리고 미움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이다.”

형제들이 자기의 한 형제를 죽이려고 하는 위기의 순간, 바로 이 때 유다는 입을 엽니다. 창세기 38잘 26-27절 에 기록하기를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형제를 죽이고, 그의 피를 은닉한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골육이니라,’ 하매 형제들이 청종 하니라.”

이렇게 해서 요셉은 위기에서 벗어났고, 애굽으로 팔려갑니다. 그리고는 노예생활도 하고, 억울하게 감옥에도 가고, 그리다가 끝내 하나님은 그를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리고 사건은 새롭게 전개됩니다.

애굽으로 팔려가 갖은 고생 끝에 총리대신이 된 요셉, 그가 그동안 얼마나 집이 그리웠고, 아버지와 동생이 보고 싶었겠습니까? 그리고 자기의 형들이 얼마나 괘씸했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의 형제, 친척들이 서운하게 한다고 미워하고 원망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찌 요셉이라고 예외이겠습니까?

어쨌든 요셉과 형들이 만나는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당시 온 세계에 7년에 걸친 대흉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형들은 곡식을 사러 애굽으로 갔고 거기에서 요셉을 만났습니다. 물론 형들은 요셉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고 아버지와 동생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번에는 꼭 베냐민을 데려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사온 곡식도 다 떨어지고 이제 또 곡식을 사러 애굽으로 가야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 야곱에게 곡식을 사러 갈 테니 베냐민을 함께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일찍이 잃어버린 아들 요셉을 생각하고는 베냐민까지 잃어버릴 수는 없다고, 보내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자 이때 유다가 말합니다.

“유다가 아비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것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그의 몸을 담보 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 그를 물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이 말을 늙으신 아버지와 어린 자녀들의 목숨이 걸린 곡식을 구하러 가면서 유다가 말한 비장한 각오입니다. 만약에 베냐민이 돌아오지 못하면 내가 영원히 그 벌을 받으리라 는 이 말은 그가 자기의 가족들을 위해 얼마나 단단히 각오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바로 그 말을 듣고 야곱도 베냐민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해서 마침내 애굽에 도착한 유다의 형제들, 그들은 요셉이 베푸는 화려한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 초대받는다는 것이 기분 좋고 편안한 일이겠습니까? 거친 광야에서 양떼나 돌보고 고생하던 팔레스틴의 목자들이 당시에 세계 최강국인 애굽의 궁정에 초대받아 갔을 때 그들이 얼마나 당황하고 서툴고 불안했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저 같은 사람이 어쩌다 일류 호텔의 뷔페에 초대받아 가서는 들어가면서부터 겁나는 경우와 같다고 생각됩니다. 더구나 첫번째 왔을 때 자기들이 낸 돈이 도로 다 자루에 들어있는 것을 집에 가서야 발견했으니 만일 그 일을 추궁하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거대하고, 낯설은 궁전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어디선가 보초병들이 뛰쳐나와 자기네들을 해칠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네들끼리 수군거렸다는 이야기까지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총리대신을 만나기 전에 몸을 씻고, 짐승에게 먹이를 주고, 가져온 선물을 정리하였습니다.

마침내 정리가 끝나고 인사를 한 후 요셉과 형제들은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음식이 좋고 많더라도 불안한 자리에서의 음식이 맛있을 리가 있습니까? 식사가 끝나고 곡식을 갖고 돌아가는 도중인데 그만 그들은 요셉의 속임수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요셉이 몰래 베냐민의 곡식자루에 술잔을 넣게 한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도둑으로 몰려 잡혀오고, 술잔이 나오는 사람은 노예가 되기로 약속을 합니다. 그런데 술잔은 베냐민의 자루에서 나왔고, 그래서 요셉은 베냐민만 남아 노예가 되라고 요구합니다.

바로 이 때 유다의 절박하고 애절한 연설, 아니 호소가 시작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어른의 종, 저의 아비의 온 마음이 그에게 쏠려 있는데, 이제 그 애 없이 저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면 우리 가운데 그 애가 없는 것을 보고 숨이 넘어 가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소인들은 어른의 종 저희 아버지로 하여금 백발로 슬퍼하며, 지하로 내려가시게 하는 격이 됩니다. 만일 그 애를 아버지에게 도로 데려가지 못한다면 소인이 평생 아버지에게 죄인이 되리라 다짐하고는 그 애를 제가 책임지고 나섰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 애 대신 소인을 남겨 두시어 어른의 종으로 삼으십시오. 그러나 그 애만은 형들과 함께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그 애 없이 제가 어떻게 아버지에게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에게 닥칠 불행을 저는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그 애 대신 저를.”
“베냐민 대신 저를.”

유다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여기 앉아있는 우리는 모두 이 사건의 결말을 뻔히 아니까, 좋은 결과가 나타날 것을 다 아니까 이렇게 쉽게 얘기할 수 있지만 대국의 재상 앞에 서있는, 그것도 재상을 속이고 물건을 훔친 것으로 되어버린 변명의 여지없는 상황에 처해 있는 유다의 마음이 얼마나 떨렸을 것이고, 얼마나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내가 대신 벌을 받겠다고 나설 수 있는, 이야기 할 수 있는 유다, 그는 진정 용기있는 사람이고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구약학자 폰 라드는 그의 창세기 주석에서 유다의 이 호소를 “구약을 통해 나타나는 가장 아름다운 연설 중의 하나” 라고 격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성서에 나타난 대부분의 인물들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 남을 속이고 싸우는데 비해서 유다는 유독 자기 입장이 아닌 자기 아버지의 입장에서 이 위험을 바라보고 있으며, 베냐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희생을 각오한 헌신이 있을 때 화해의 역사가 이루어짐을 성서는 보여줍니다.

함께 예배드리시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주안의 성도 여러분!
선교 10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내가 내 형제를 위해, 친구를 위해, 이웃을 위해 희생하겠다고 하는 새로운 각오가 아닌가요? 우리가 우리의 자라나는 젊은이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하는 일을 꾸중만 하고 야단만 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를 향한 그들의 순수한 목소리를 내가 대신 외치겠다고 다짐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은가요? 우리의 속회가 안고 있는 어려움, 우리의 선교회가 안고 있는 어려움, 우리의 교회가 안고 있는 어려움을 다른 사람에게 떠맡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대신 하리라고 나서는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요?

“내가 대신 하리라” 고 나서는 유다의 이 이야기는 구약을 통해 처음으로 공동체의 구원을 위해서는 한 개인의 헌신적인 자기희생이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바로 이 생각을 가장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아가신 분을 우리는 압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일찍이 선지자 제2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합니다.

오늘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러분, 우리 모두 다시 한 번 서로의 어려움을 생각하면서, 기도하면서 마음 속으로 다짐합시다.

“내가 대신 하리라.”

그리고 주님을 따라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