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3. 20 / 걸려 넘어지지 않는 복 / 누가복음 7:18-23
걸려 넘어지지 않는 복(2011.3.20)
본문) 누가복음 7:18-23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요한에게 알렸다. 요한은 자기 제자 가운데서 두 사람을 불러, 주님께로 보내어 ”선생님이 오실 그분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어보게 하였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이 우리를 선생님께 보내어 ‘선생님이 오실 그분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어보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질병과 고통과 악령으로 시달리는 사람을 많이 고쳐주시고, 또 눈먼 많은 사람을 볼 수 있게 해주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가서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다시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
(표준새번역 개정판)
일본에서의 진도 9.0 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원자력발전소 폭발로 인한 피해가 너무나 커서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웠던 한 주간을 보냈습니다. 지금 일본에서는 수돗물이나 채소 등에서 방사능이 나온다고 하는데 이것을 앞으로 어떻게 극복해 낼지 참으로 걱정스럽습니다. 제발 더 이상의 지진이 일어나지 않고, 원전 폭발도 확대되지 않고 마무리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건물을 튼튼하게 짓고, 방파제를 높이 쌓는다 해도, 또 원전에 안전대책을 아무리 잘 세운다 해도 자연의 힘 앞에 얼마나 무력한지를 경험하면서 한껏 낮아지고 겸허해져야 함을 깨닫는 기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또 걱정되는 것이 있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2004년 인도네시아 지진해일 때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해서 크게 망신을 당했었지요.
“쓰나미 희생자들은 예수를 제대로 믿지 않은 자들이다. 그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다. ...... 태국 푸켓에 놀러 갔던 유럽인들이 많이 죽었는데, 예수 제대로 믿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이번에는 제발 조용히 지나가기를 바랐는데 여지없이 터졌습니다. 이번에는 여의도에 있는 순복음교회 원로목사님이 한 건 하셨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지요.
“이번 일본의 대재앙은 일본인들의 우상숭배, 무신론, 물질주의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일본사람들을 심판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렇지요. 입이 근질근질해서 어찌 조용히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 엄청난 고통을 당하는 이웃을 향해 “너희의 죄 때문”이라고 큰소리쳐야 속이 시원한 사람들이니 그런 말 하지 않고 어찌 견디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행방불명되었는지 알 수 없고, 앞으로 어떤 피해를 어떻게 얼마나 당하지 알 수 없어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또 일본사람들이 그 고통 속에서도 사재기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큰소리내어 울지 않으면서 그 모든 고통을 참아내기 위해 참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그들을 위로하기는커녕 그들을 향해 하나님의 경고라고, 심판을 내리신 것이라고 말을 해야 속이 시원하겠습니까?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근본적인 물음을 하나 던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는 소위 대형교회 목사님들은 왜 그렇게 함부로, 그렇게 쉽게 어려움 당한 사람들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는가요? 어떻게 그들은 그 아픔 당한 사람들을 향해서, 가족을 잃고 피눈물을 흘리고, 일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경고라고 하는 말을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찌 그렇게 쉽게 스스로 재판관의 자리에 앉아서 너희들은 하나님의 벌을 받은 것이라고 큰소리칠 수 있는 것인가요?
그것은 바로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오로지 심판관이신 하나님이요, 자기들은 그 신으로부터 심판관의 자리에 앉은 특별한 존재들이라고 하는 교만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고 지극히 율법적인 신앙, 무섭고 겁을 주는 하나님만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 그들이 설교하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심판하는 하나님, 무서워하는 하나님, 재단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가 전국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제목이 불기둥이고, 거기에 실린 설교문에 끊임없이 지옥과 불의 심판 이야기가 나오는 것만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그분의 설교를 받아보았는데 보통 두 편 중의 하나에는 지옥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분은 끊임없이 뜨거운 불이 펄펄 끓는 지옥에 가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겁이 날 것이고,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쩔쩔 매는 신앙생활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목사는 교인들을 움켜쥘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런 설교를 끊임없이 하는 것은 오로지 그가 만난 하나님이 그런 분이기 때문이고, 따라서 그런 목사들의 눈으로 보면 이번 지진 사건은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도 쉽게 너희들이 심판받았다고, 지옥으로 간다고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율법주의자로 만들었고, 자기들만은 그 율법을 다 지켰기에 복을 받고 큰 교회를 만들었으며, 돈도 많이 벌었고, 따라서 재앙을 당한 모든 사람들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저주할 권한을 받았다고 하는 엄청난 교만의 죄를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의 신앙은 올바른 것인가?
누가복음 4장부터 7장 17절까지에서 예수는 아주 많은 사역을 행하셨습니다. 4장 1-13절에서 세 가지 시험을 이기신 예수께서 막 활동을 시작하시게 되었는데 이때 누가복음 기자는 마치 도입부처럼 이러한 요약문을 남겨 놓았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을 입고 갈릴리로 돌아오셨다. 예수의 소문이 사방의 온 지역에 두루 퍼졌다. 그는 유대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으며, 모든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셨다.” (누가복음 4:14-15)
그리고는 처음으로 고향 나사렛에 가셔서 첫 번째 설교를 하셨으니 이사야서를 읽은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사야서 61:1-2절을 읽으심으로써 앞으로 당신이 하실 일이 무엇인지를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누가복음 4:18-19)
여러분, 보십시오,
예수께서 앞으로 하실 일을 다음과 같이 선포하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의 은혜의 해 곧 희년입니다. 모든 빚진 자들과 노예 된 자들을 탕감해 주고 해방시켜주는 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들, 포로 된 사람들, 눈먼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 빚진 자들과 노예 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후 누가복음에는 예수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비해서 유난히 누가복음에는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오늘의 본문 앞에까지 참으로 많은 기적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들린 사람을 고치셨다(4:31-37).
많은 병자들과 귀신들을 쫓아내셨다(4:38-41).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셨다(5:12-16).
중풍병자를 고치셨다(5:17-26).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셨다(6:6-11).
예수께 손을 댄 사람은 무슨 병이든 나았다(6:17-19).
백부장의 종을 멀리서 고치셨다(7:1-10).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셨다(7:11-17).
그렇습니다.
불과 넉 장밖에 되지 않는 짧은 내용에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이 참으로 많이 들어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얼마나 놀라운 능력을 가지신 분이신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 바로 앞인 7장 17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대와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지역에 퍼졌다.”
물론 당연히 세례 요한도 그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18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요한에게 알렸다.”
그리고 다시 당연히 세례 요한이 던질 물음, 바로 “예수가 누구냐?”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가? 예수가 과연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바로 그 메시아인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실 메시아인가?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어 묻게 했습니다.
“선생님이 오실 그분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자, 이제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가서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다시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여러분!
앞에 나온, 4장 18-19절에 나온 예수의 첫 번째 설교와 아주 흡사하지요. 사실상 그것의 확대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새삼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이상한 구절이 덧붙어 있습니다. 23절입니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무슨 말입니까?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요? 도대체 걸려 넘어지는 것은 무엇이고, 걸려 넘어지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잘 보십시오.
여기 나오는 사람들, 즉 눈먼 사람, 다리 저는 사람, 나병환자, 귀먹은 사람, 죽은 사람, 가난한 사람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바로 정결하지 못한 자들, 즉 불결한 자들, 율법적으로 깨끗지 못한 자들, 그래서 죄인들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것처럼 바리새파 사람들이 눈 먼 사람 하나를 예수께 데려다가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라고 묻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들은 한 마디로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께로부터 벌을 받은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무언가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받고, 벌을 받고, 고통을 당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죽은 사람은 더 말할 것 없이 불결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은 누군가가 죽어 있으면 근처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이 복을 베풀지 않아서 가난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오늘날 어떤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친다지요. “믿음이 없어서 가난한 것이다. 예수 믿으면 부자가 되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눈먼 사람, 다리 저는 사람, 나병환자, 귀먹은 사람, 죽은 사람, 가난한 사람들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결코 용납받을 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은 그런 자들을 결코 가까이 하지 않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바로 그런 자들을 철저하게 가까이 하셨고, 받아들이셨고, 제자로 삼으셨고,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예수는 그들을 늘 찾아가셨고, 언제나 친근하게 맞아주셨고, 그들이 도움을 단 한 번도 거절하지 않으시고 도우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밥도 먹고, 여행도 다니고, 삶을 함께 했습니다. 그래서 34절에 의하면 예수를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라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더러운 자들의 친구는 결코 메시아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가 믿는 하나님, 예수가 증거했던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을 율법으로 심판하고,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내리치시는 분이십니까? 아니면 끊임없이 죄인들을 찾아가시고, 가까이 하시고, 위로하시고, 고쳐주시고, 사랑하시던 분이셨습니까?
그렇습니다.
24절에서 말씀하시는바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씀은 바로 예수가 믿는 하나님은 함부로 다른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하나님의 천벌을 받았다고 심판하는 율법주의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받아주시고, 제자 삼으시고, 하나님 나라 일꾼으로 삼으시는 분이심을 깨닫고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예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시고, 모든 환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품어주시고,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예수에게서 자기들이 믿던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없었기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바로 이 문제에서 위기에 맞닥뜨려 있는 것이고, 바로 이 문제에서 세상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쉽게 다른 사람들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죄 때문에 심판받은 것이라고 경고하는 그들은 결국 예수님께 걸려 넘어진 것이고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것입니다. 그들이 전하는 하나님은 결코 예수가 전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들이 만난 하나님은 결코 예수가 만난 하나님이 아닙니다.
여러분!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누려야 하는 복,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 걸려 넘어지지 않는 복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하고, 아무리 높은 직분을 가졌다 하더라도, 세상적으로 아무리 많은 축복을 누린다 하더라도 그들이 예수께 걸려 넘어진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결코 참된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참으로 신앙생활하기 어려운 시대, 참된 예수의 모습 또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주기 원하셨던 참된 하나님의 모습을 만나는, 그런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