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0. 17 / 너희까지도 떠나가려느냐? / 요한복음 6:66-71
너희까지도 떠나가려느냐?(2010.10.17)
본문) 요한복음6:66-71
“이 때문에 제자 가운데서 많은 삶이 떠나갔고, 더 이상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물으셨다. ‘너희까지도 떠나가려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심을 믿고, 또 알았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않았느냐? 그러나 너희 가운데서 하나는 악마이다.’ 이것은 시몬 가룟의 아들 유다를 가리켜서 하신 말씀인데, 그는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예수를 넘겨줄 사람이었다.” (표준새번역 개정판)
며칠 전에 제가 모처럼 시간을 보내기 위해 도서관에 갔었습니다. 제가 사는 집 근처에 경기도립도서관이 있어서 갔는데 등록이 되어 있지 않아서 출입카드도 새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사진이 필요한데 없다고 했더니 즉석에서 찍어서 만들어주더군요. 아주 편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좌석배정을 받는데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쩔쩔매고 있으려니까 어떤 여학생이 와서 가르쳐 주었습니다. 덕분에 잘 했는데 완전히 노친네 티를 내고 말았습니다.
우선 내부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어디를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 둘러보았습니다. 참고자료실이라고 있어서 들어갔더니 신문이나 잡지 등 많은 자료들이 있더군요. 마침 기독교사상이라는 잡지가 눈에 띄어서 집어 들었습니다. 제가 젊었을 때 아주 많이 읽던 잡지였기에 반가웠습니다. 책을 폈더니 마침 한국의 3대 종교 특집이 실려 있었습니다. 개신교, 천주교, 불교의 현재 상황을 진단하고 그 종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을 지적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내부에 있는 인사들이 자기네 종교를 비판적 입장에서 살펴본 내용이었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개신교는 대개 아는 내용이었고, 불교계는 제가 잘 모르니까 뭐라 말하기 어렵고 문제는 천주교 부분이었습니다.
제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거나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으로 볼 때 현재 한국 개신교는 교인수가 줄고 있지만 천주교는 급격하게 늘고 있다는 것이 정설처럼 되어 있습니다. 제 주위에도 교회에 다니다가 성당으로 옮긴 사람들이 제법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글을 쓴 사람의 주장에 따르면 정부에서 발표하는 통계상으로는 천주고 신자가 늘어나는 것으로 나오는데 막상 성당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름만 걸어놓고 나오지 않는 신자들이 많이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사에 참여하지 않는 신자들의 숫자가 급격히 늘고 있고, 또 젊은이들의 참여 또한 급격히 줄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글을 보면서 참으로 놀랐습니다. 개신교와 천주교를 합해서 기독교라고 한다면 그중 개신교가 줄고 천주교가 늘어난다고 했을 때 기독교 전체로 보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개신교는 물론이요 천주교까지 줄어든다면 그야말로 기독교계 전체로 보았을 때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한국기독교는 어떻게 될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대체 왜 숫자가 줄어들고 있는지,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할 것인지 묻게 되었고 바로 오늘의 본문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이해하려면 요한복음 6장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다 읽고 설교를 하면 좋은데 분량이 너무 많아서 다 읽을 수 없습니다. 아쉬운 대로 1절부터 간단하게 설명하면서 오늘의 본문을 보겠습니다.
6장은 1절부터 그 유명한 오병이어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가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은 네 복음서에 다 기록된 몇 가지 안 되는 사건 중의 하나입니다. 그만큼 널리 알려진 사건이고,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네 복음서에 다 나오는 것이 예를 들어 십자가 사건과 부활 등 몇 가지 있지요. 그런데 그 중요한 예수의 탄생 사건 같은 것도 마태와 누가에만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병이어 사건은 네 복음서에 다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사건을 기록했다고 해서 네 복음서가 그 세부적인 내용까지 똑같게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큰 줄거리, 즉 보리빵이 다섯 개요, 물고기가 두 마리라는 것과 그것을 먹은 성인남자의 수가 오천 명이라는 것은 같습니다마는 세부적인 내용에는 다른 표현들이 제법 들어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은 앞의 세 복음서, 마태와 마가와 누가복음에 나오는 내용과 비교했을 때 확실히 다른, 두드러지게 다른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우선 하나는 요한복음 6:5-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거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침 유대 사람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 때였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서,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모여드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어디에서 빵을 사다가,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예수께서는 빌립을 시험해 보시고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자기가 하실 일을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요한복음 6:5-6)
분명히 마태복음 14장, 마가복음 6장, 누가복음 9장에 나오는 똑같은 사건 기록 그 어디에도 “예수께서는 빌립을 시험해 보시고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었다”는 표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자기의 제자들이라고 하는 선택받은 자들이 과연 어떤 믿음의 소유자들인지 시험해 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요한복음 기자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가 하실 일을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보통 사람들과는 무언가 다른 특별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요한복음에는 마태, 마가, 누가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6장 14-15절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도 역시 다른 복음서에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참으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그 예언자이다’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억지로 자기를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요한복음 6:14-15)
자, 예수는 누구이신가? 14절에 의하면 사람들은 예수를 ‘예언자’라고 부르고 있고, 15절에 의하면 사람들은 예수를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예수를 ‘예언자 중의 하나’라고 부르고 또 예수를 ‘왕’으로 모신다고 되어 있을까요?
여러분!
예언자와 왕은 공통점이 있지요? 바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구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신 사람들에게 기름을 부어주는데 그 기름부음을 받는 사람이 세 가지 종류입니다. 바로 왕, 예언자, 제사장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름부음 받은 자’를 히브리어로 ‘메시아’라고 부르고, 이를 희랍어로 번역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곧 예수가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예수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고 고백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고백은 곧 예수가 우리의 ‘왕’이시고, 우리의 ‘예언자’이시고, 우리의 '제사장‘이시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오병이어 사건이라고 해도 요한복음은 예수가 ‘메시아’ 즉 ‘그리스도’로 오신 분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기록된 사건이라는 점에서 다른 세 복음서와 차이가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는 예언자요 왕이라는 표현으로 다 나타낼 수 있는 분인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왕이나 예언자는 여러 사람 등장하는데 예수도 그런 왕이나 예언자들과 동격의 인물로 끝나고 말 것인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기자에 의하면 그것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합니다. 예수가 누구이신가를 나타내는 데는 무언가 결정적인 것이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는 오병이어 사건에 이어서 바로 16-21절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날이 저물었을 때에, 예수의 제자들은 바다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갔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께서는 아직 그들이 있는 곳으로 오시지 않았다. 그런데 큰 바람이 불고, 물결이 사나워졌다. 제자들이 배를 저어서, 십여 리쯤 갔을 때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무서워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래서 그들은 기꺼이 예수를 배 안으로 모셔들였다.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다.” (요한복음 6:16-21)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다”라는 이 표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을 증거하셨을 때 친히 말씀하셨던 그 표현, “나다.” 이 한 마디로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이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이 22절부터 나오는 내용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이 있고 나서 그 다음날, 무리들이 예수님을 찾아 가버나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았을 때 분명히 예수를 ‘예언자’라고 부르고, ‘왕’으로 삼으려고 했었는데 이제 하루가 지나자 곧바로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부름으로써 예수가 누구이신지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여라.” (요한복음 6:26-27)
무슨 말입니까?
무리들은 예수가 누구이신지 올바른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찾아온 것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에 또다시 빵을 먹기 위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단순히 먹으면 또다시 배고파질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 곧 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참으로 뜻밖의 대답입니다. 무리들은 아마도 이런 대답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성전제사에 빠짐없이 나가라. 제물을 많이 바칠수록 믿음이 좋은 것이다. 율법을 하나라도 어기지 말고 빠짐없이 다 지켜라.”
이것이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이 가르쳤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런 말씀들은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나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당연히 알아듣지 못한 그들은 다시 물었습니다.
“우리에게 무슨 표징을 행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보고 당신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당신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하늘에서 빵을 내려서, 그들에게 먹게 하셨다’ 한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 (요한복음 6:30-31)
그렇습니다.
다시 빵을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만나가 내리게 한 것처럼 당신도 매일매일 먹을 빵을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당장 돈 벌게 해 주면 예수 믿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결정적인 말씀을 던지셨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요 6:35)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빵이다.” (요 6:4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 (요 6:51)
“내 살은 참 양식이요, 내 피는 참 음료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요 6:55-56)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인데 그 살이 곧 양식이요, 피가 음료라고요? 내가 줄 빵은 내 살이고, 그것이 세상에 생명을 준다고요? 그러니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요? 그래서 초대교회 당시 로마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에게 식인의 풍습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과연 그런 것입니까?
물론 이 구절들을 통해 우리는 성찬식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마는 저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고자 합니다. 여기 예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하신 말씀은 곧 “너희도 나처럼 살라”는 말씀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저 예수 믿으면 빵이 생긴다니까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처럼 살면 그것이 곧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입술로만 믿지 말고 예수를 믿는 사람답게 살아라, 그것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이며 그런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말씀이 어렵습니다. 우리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 당시 예수께로부터 친히 말씀을 듣던 무리들도 어려웠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60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서 여럿이 이 말씀을 듣고 말하기를 ‘이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결국 오늘의 본문에 이렇게까지 나와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제자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떠나갔고, 더 이상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말씀도 어렵지만 그보다는 삶이 따르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더 어렵기에 떠나간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빵도 매일 먹을 수 있고, 돈도 많이 생긴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따를텐데 예수님처럼 살아야한다면 그것이 너무나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떠나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개신교와 천주교 신자들, 그중에서도 젊은이들은 왜 교회를 떠나가고 있는가? 예수의 말씀이 어렵기 때문인가? 아닙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기가 어렵기도 하고 동시에 말로는, 겉으로는 신앙생활 잘 한다는 사람들이 신앙과 일치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에 실망해서 떠나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방송을 들으시는 분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많이 계시겠지요? 교회는 나가고 싶은데 교인들 보기 싫어서 나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지요.
그러나 여러분!
사람들은, 지도자들은 여러분을 실망시킬지 모르지만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떠나가는 여러분을 향해서 지금도 묻고 계십니다. “너희까지도 떠나가려 하느냐?”
예수의 이 질문을 당시 제자들에게 하신 질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오늘 우리들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 한다고 말은 하지만 열심을 내지 않고 있는 분들, 또 신앙생활하다가 시험에 들어서 낙심해서 쉬고 있는 분들, 또 내가 예수는 좋아하는데 사람들 보기 싫어서 교회에 안 나간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에게 예수께서 지금도 묻고 계십니다.
“너희까지도 떠나가려 하느냐?”
그런데 바로 이때 베드로가 고백했습니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심을 믿고, 또 알았습니다.”
여러분!
사는 것이 참으로 힘드시지요. 신앙생활에 회의가 들 때도 많으시지요. 그러나 우리를 실망시키는 사람을 보지 말고 오직 예수만 바라보십시다. 너희까지도 떠나가려느냐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을 기억하십시다. 그리고 베드로같이 우리가 어디로 떠나가겠느냐고, 주님 곁에 있겠노라고 고백하고 주님 곁으로 나아가십시다. 주님 곁을 지키십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날까지 주님 곁에 머물며 우리의 신앙을 지켜 가십시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희망이심을 믿고 용기를 내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