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8. 22 / 왜 엘리야인가? / 마가복음 6:14-16
왜 엘리야인가? (2010. 8. 22)
본문) 마가복음 6:14-16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니, 헤롯왕이 그 소문을 들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세례자 요한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그 때문에 그가 이런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하고, 또 더러는 말하기를 ‘그는 엘리야다’ 하고, 또 더러는 ‘옛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과 같은 예언자다’ 하였다. 그런데 헤롯이 이런 소문을 듣고서 말하기를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살아났구나’ 하였다.” (표준새번역 개정판)
저는 이번 여름을 그야말로 예언자 엘리야와 함께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 4월에 마태복음 강해를 마치고 난 후 5월부터 주로 열왕기서를 본문으로 해서 설교를 해 왔는데 설교의 주제가 주로 엘리야였습니다. 이상하게 제 눈에 엘리야의 여러 모습들이 들어왔고, 그래서 그것을 전했던 것입니다. 이제 엘리야에 대해서는 할 만큼 했나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오늘 또다시 엘리야에 대해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마가복음을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발견한 것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를 엘리야와 비교하고 있는 당시 사람들의 모습들이 여러 번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여러분!
마가복음은 네 복음서 중 가장 먼저 쓰여졌다고 알려져 있고, 마태나 누가는 마가를 기본으로 삼았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또 마가복음은 네 복음서 중에서 가장 분량이 적은 책입니다. 불과 열여섯 장밖에 되지 않는 짤막한 책이고, 구조도 아주 단순합니다. 그런데 그중에 예수와 엘리야를 관계짓는 구절이 세 군데나 나옵니다. 저도 이번에 새삼스레 그것을 발견하고 조금 놀랐습니다.
제일 먼저 마가복음 6장 14-16절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의하면 예수께서 이제 유명해지셨고,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마침내 헤롯왕에게까지 소문이 들어갔습니다. 당연히 헤롯이 주위 사람들에게 대체 예수가 누구냐 라고 물었을 것이고, 틀림없이 비밀경찰들을 보내어 예수를 정탐하고, 뒤를 캤을 것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지 독재자들은 비밀경찰을 조직해서 그것으로 백성들을 감시하고, 특히 자기에게 도전하고 자기 자리를 뒤흔들 사람들은 뒤를 캐서 없애려 하고 죽이려 하는 것입니다. 헤롯왕이 그 짓을 하지 않았을 리 없고 당연히 정보원들을 통해 예수에 대해 조사하게 하고, 정보를 보고받았을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뭐라고 떠드는지 혹 백성들을 충동해서 헤롯왕에게 덤비라고 말하지는 않는지, 또 사람들은 예수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조사해서 보고하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비밀경찰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예수에 관해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듣고 그것을 왕에게 보고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그 때문에 그가 이런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는 엘리야다’라고 말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옛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과 같은 예언자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소문이 떠돈다는 보고를 받은 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살아났구나.”
8장에 가면 다시 한 번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의 가이사랴에 있는 여러 마을로 나서셨는데, 도중에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도 역시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 궁금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소문이 돌아다니는지 물으셨겠지요. 그러자 제자들이 주위 사람들로부터 들은 소문을 전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개중에는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가복음 8:28)
그러니까 이 두 가지 기록은 분명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엘리야가 다시 나타난 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소문이 유대 땅 전역에 널리 퍼졌고, 심지어는 왕궁에 사는 왕에게까지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도대체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엘리야와 비교했을까? 예수님을 엘리야가 다시 살아온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마가복음 15장에 가면 엘리야가 다시 한 번 더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로마 군인들에게 붙잡혀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의 일입니다. 아침 아홉 시에 십자가에 달리신 후 열두 시가 되었을 때,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세 시가 되었을 때 예수께서 큰소리로 부르짖으셨습니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그것은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하는 뜻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달려 외치셨던 이 간구가 시편 22편에 나오는 기도문임을 알고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어찌하여 그리 멀리 계셔서,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나의 간구를
듣지 아니하십니까?
나의 하나님,
온종일 불러도 대답하지 않으시고,
밤새도록 울부짖어도
모르는 체 하십니다.“ (시편 22:1-2)
이것은 너무나 유명한 기도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시편 말씀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임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마가복음 15:35-36절에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몇이, 이 말을 듣고서 말하였다. ‘보시오, 그가 엘리야를 부르고 있소.’ 어떤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을 신 포도주에 푹 적셔서 갈대에 꿰어, 그에게 마시게 하며 말하였다. ‘어디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주나 두고 봅시다.’ ”(막 15:35-36)
아무리 ‘엘로이’라는 단어와 ‘엘리야’라는 이름이 비슷하다 하더라도 어떻게 엘리야를 부르고 있다고, 또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주나 두고 보자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대체 그렇게 말한 이유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어쨌든 마가복음에 나오는 이 세 구절을 보면 예수님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엘리야와 닮은 사람이라고 얼마나 많이 생각했는지, 예수님은 엘리야가 다시 살아온 사람이라고 믿었는지를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그 이유를 알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예언자 엘리야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의 두 번째 왕이었던 아합 왕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아합 왕 시대란 대체 어떤 시대였던가?
북왕국 이스라엘은 왕조의 교체가 아주 심했던 나라입니다. 남왕국 유다가 340여 년 동안 다윗의 후손들로 하나의 왕조로 이어진 데 반해 북왕국 이스라엘은 훨씬 짧은 208년 동안에 무려 9개의 왕조가 만들어졌으니 그야말로 쉴 새 없이 반역이 일어나고 그래서 왕조가 교체되는 일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중에는 5대까지 이어진 것이 가장 긴 것이었고, 심지어는 1대로 끝난 왕조가, 그러니까 왕조라고 말할 수 없는 것도 네 개나 되고, 시므리는 단 일주일 만에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 시므리왕을 죽이고 제4왕조를 시작한 것이 오므리이고, 그의 아들이 바로 아합 왕이었습니다.
오므리와 아합은 비록 성경에는 아주 못된 왕으로 심하게 비난을 받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군주국가를 크게 발전시킨 왕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정복군주로서 암몬과 모압을 점령했고, 에돔과 유다를 속국으로 삼았습니다. 북쪽으로는 갈릴리 끝인 단까지, 심지어는 시리아 남부까지 점령했습니다. 고고학자들의 발굴에 의해 그 시대 건조된 거대한 왕궁과 요새들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엄청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또한 성경에도 나오는 대로 궁중예언자 850명이 있었다는 것도 그들이 얼마나 잘 조직되고, 그 힘이 강성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오므리와 아합은 끊임없는 정복전쟁으로 재물들을 약탈했고, 주변 나라들이 보내오는 조공물들로 경제적 풍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공지상주의를 뒷받침해 준 것이 바로 바알 신 숭배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왕과 귀족들, 제사장이나 궁중예언자 같은 지배계급들은 전쟁과 약탈을 일삼고, 그것으로 그야말로 말할 수 없는 부귀영화를 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합 왕의 권력과 그가 누리는 부귀영화는 결국 이스라엘 백성이든 이방인의 백성이든 그 땅에 사는 일반 백성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해서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권력을 동원하여 왕이나 귀족들이 일반백성들의 토지를 몰수하는 일들은 숱하게 일어났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이나 강제노동에 동원되어야 했던 백성들로서는 땅을 지키는 일이 너무나 버거웠고, 권력의 횡포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회에서는 너무나 쉽게 과부나 고아가 되어 비참하게 세상을 마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갈멜 산에서의 850 대 1의 싸움에서 나타난 것처럼 백성들 편에 서야 할 예언자나 제사장들도 대부분 권력자 편에 서서 그들의 성공을 기원하고 권력을 뒷받침해 주면서 그 대가로 물질적인 부와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보장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종교도 철저하게 가진 자들, 권력자들 편에 섰지 백성들을 위한 입장에 서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오직 한 사람, 엘리야만이 지배계급을 비판하고 백성들 편에 섰습니다. 엘리야만이 아합 왕과 왕비 이세벨을 상대로 처절하게 싸웠고,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고아와 과부들을 찾아가서 격려하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심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니 당시 지배계급들이 엘리야를 곱게 보았을 리가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예언자들이 대부분 거대담론을 다룬 말씀으로 남아 있는데 비해서 엘리야는 무슨 설교를 했는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었는지 그 사건들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야의 활동은 무슨 거창한 이념이나 이론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고통을 당한 사람들의 그 생생한 역경과 함께 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의 이야기들이 주축을 이룹니다. 그런 점에서 엘리야는 백성들, 민중들 가슴에 살아남았고, 그것이 몇 백 년이 지나도록 입에서 입으로 이어지다가 마침내 예수에게서 다시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를 엘리야와 비교하는 이야기들은 한결같이 예수께서 불쌍한 사람들을 고치시고 살리시는 일을 행한 끝에 나타납니다. 6장 14절 이하에 나오는 기록도 5장에 나타난 여러 가지 사건들 즉 귀신 들린 사람들을 고치시고,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혈루증 걸린 여자를 고치시고 난 다음에 나타납니다. 6장 1-6절에 예수께서 가르치셨다는 기록이 나옵니다마는 그것도 가르침의 내용이 기록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놀랐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8장에도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과 벳세다에서 눈 먼 사람을 고치신 사건을 행하신 후에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당시 백성들이, 민중들이 예수를 엘리야와 동일시했다는 것은 그 두 사람의 삶과 역할이 같았기 때문입니다. 무자비한 권력에 저항하고, 부패한 종교지도자들을 비판하면서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들과 함께 했으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평화를 전했던 인물들, 그들이 바로 엘리야요, 예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백성들의 마음에 살아남았고, 그래서 그 두 사람은 하늘로 올라갔다고 기록된 것입니다.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고,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었지만 다시 살아나셔서 결국 하늘로 올라갔다고 기록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은 똑같이 백성들의 마음에 살아남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엘리야를 보내셔서 또 예수를 보내셔서 그들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새 힘을 주십니다. 그리고 아합왕 시대 때 엘리야를 보냈던 하나님께서, 헤롯왕 때 예수를 보내셨던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시대에도 성령으로 함께 하셔서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새 힘을 주십니다. 한국교회가 이러한 역할을 감당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빕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렵지만 엘리야와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와도 함께 하시기는 것을 믿고 힘을 내어 다시 힘차게 살아가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