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28 / 무덤을 지키다 / 마태복음 27:62-66
무덤을 지키다(2010. 2. 28)
본문) 마태복음 27:62-66
“이튿날 곧 예비일 다음날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빌라도에게 몰려가서 말하였다. ”각하, 세상을 미혹하던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 사흘 뒤에 자기가 살아날 것이라고 말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흘째 되는 날까지는, 무덤을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해 주십시오. 혹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 가고서는, 백성에게는 ’그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이번 속임수는 처음 것보다 더 나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경비병을 내줄 터이니, 물러가서 재주껏 지키시오.” 그들은 물러가서 그 돌을 봉인하고, 경비병을 두어서 무덤을 단단히 지켰다.“ (표준새번역 개정판)
마침내 그들은 이겼습니다.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예수를 잡아 죽이려던 그들의 계획은 마침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는 죽었고, 무덤에 들어갔습니다. 커다란 돌멩이가 무덤 입구를 막았고, 그 누구도 무덤 안에서 살아나올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다 끝났습니다.
사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예수를 잡아 죽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예수께서 권위있는 말씀도 선포하시고,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심으로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자 위협을 느끼던 그들은 마침내 예수께서 안식일까지 범하는 것처럼 느끼게 되자 곧바로 예수를 잡아 죽일 모의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 이미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계획을 세우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서,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런데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도 괜찮습니까?’ 하고 예수께 물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다고 하자. 그것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그것을 잡아 끌어올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괜찮다.’ 그런 다음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을 내밀어라.’ 그가 손을 내미니, 다른 손과 같이 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서,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 (마태복음 12:9-14)
여기서 우선 예수를 잡아 죽이기로 모의를 한 사람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에 정통하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며, 일생동안 율법에 맞추어 살던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죽이는 일에 앞장 선 것이었습니다. 특히 그들이 율법 가운데서도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예수께서 안식일을 공공연히 어기는 것을 내버려두었다가는 자기네 권위도 떨어질 뿐만 아니라 유대교의 뿌리 자체가 뒤흔들릴 것 같은 걱정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를 없앨 수 있을지 의논하기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합세한 것이 대제사장 그룹입니다. 그들 역시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이 두려웠고, 특히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해 자기들의 기득권을 잃어버리게 될까 겁이 났던 것입니다. 21:45-46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의 비유를 듣고서, 자기들을 가리켜 하시는 말씀임을 알아채고, 그를 잡으려고 하였으나, 무리들이 무서워서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무리가 예수를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1:45-46)
그 다음에 예수를 죽이는 일에 합세한 것은 백성의 장로들입니다. 그들 역시 예수를 살려두었다가는 모든 백성들이 다 예수를 따라갈까 겁이 났던 것입니다.
“그 즈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는 대제사장의 관저에 모여서, 예수를 속임수로 잡아서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백성 가운데서 소동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명절에는 하지 맙시다’ 하고 말하였다.” (마태복음 26:3-5)
자, 보십시오, 거의 공생애 초기부터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고, 거기에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합세해서 하나가 되어 예수를 잡아 죽이는 일을 추진했던 것입니다. 사실 바리새파 사람들과 대제사장들은 그렇게 사이가 좋은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믿는 것도 조금씩 달랐고, 서로 자기들이 잘났다고 큰소리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로마의 앞잡이라고 욕했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해서 지나치게 율법에 사로잡혀 있고, 또 건방지다고 비방했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한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잡아 죽이는 일에 있어서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마침내 예수를 잡아 죽인 것입니다.
이제 목적을 이룬 바리새인들, 대제사장들, 백성의 장로들은 마음 편히 잠을 이루어도 되는 상황입니다. 예수는 확실히 죽었고, 무덤에 들어갔으며, 큰 돌로 입구가 막혔으니 이제 상황 끝입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갔고, 기껏해야 여자들 몇이서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정도이니 그녀들이 무슨 일을 벌일 수 있겠습니까? 그녀들이 무슨 수로 큰 돌을 굴릴 것이며, 또 시신을 가져가겠습니까? 바리새인들, 대제사장들, 장로들은 이제 확실히 이긴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분명히 이긴 것처럼 보였던 그들이 아직도 무언가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무언가 엄청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떨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것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튿날 곧 예비일 다음날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빌라도에게 몰려가서 말하였다. ”각하, 세상을 미혹하던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 사흘 뒤에 자기가 살아날 것이라고 말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흘째 되는 날까지는, 무덤을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해 주십시오. 혹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 가고서는, 백성에게는 ’그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이번 속임수는 처음 것보다 더 나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
무슨 말입니까?
세상을 미혹하던 그 사람, 즉 예수가 살아 있을 때에 사흘 뒤에 자기가 살아날 것이라고 말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덤을 지키지 않게 되면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가 놓고는, 예수가 살아났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릴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군인들을 보내어 무덤을 지켜달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께서는 세 번에 걸쳐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면서 그 때마다 다시 살아나리라는 말씀을 꼭 덧붙이셨습니다. 이미 우리가 다 보아온 내용들입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며,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며,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마태복음 16:21)
“제자들이 갈릴리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인자가 곧 사람들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죽일 것이다. 그런데 그는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날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들은 몹시 슬퍼하였다.” (마태복음 17:22-23)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열두 제자를 따로 곁에 불러놓으시고, 길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보아라,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들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며, 그를 이방 사람들에게 넘겨주어서,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달아서 죽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날 것이다.’ ” (마태복음 20:17-19)
예수께서 세 번씩이나 공공연하게 이런 말씀을 하셨으니 그 말씀이 어찌 퍼져나가지 않았겠습니까? 제자들은 자기 가족, 친지, 친구들이나 아는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그들은 그것을 또 누군가에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바리새인들이나 대제사장들, 장로들도 당연히 그 말씀을 전해 들었을 것이고, 그래서 겁이 났을 것입니다. 특히나 부활 사상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그 말씀이 결코 허무맹랑한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능력 많으신 예수께서 혹시나 살아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막으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바리새인, 대제사장들, 장로들을 겁나게 하는 것이 또 하나 있었으니 바로 구약 호세아서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제 주님께로 돌아가자.
주님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
이틀 뒤에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니,
우리가 주님 앞에서 살 것이다.“ (호세아서 6:1-2)
이 구절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리라는 뜻을 담은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의 행적과 맞물리면서 하나님께서 사흘 만에 무덤에 들어간 예수를 일으켜 세우실 것이라는 뜻을 내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니 이 구절을 알고 있는 바리새인 등이 겁을 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호세아도 그렇게 예언을 했고, 예수님도 그렇게 예언을 했으니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겁이 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돌멩이로 막아놓고 지키면 나오지는 못할 것 아닌가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빌라도는 경비병을 배치하라고 명령합니다.
“경비병을 내줄 터이니, 물러가서 재주껏 지키시오.”
재주껏 지키라고요? 한껏 비웃는 빌라도의 모습이 눈에 선하지 않습니까? 죽은 사람을 무서워하는 종교지도자들이라니, 이방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한심해 보였던 것입니다. 어쨌든 그들은 물러가서 그 돌을 봉인하고, 경비병을 두어서 무덤을 단단히 지켰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명색은 종교지도자라고 하면서 사실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습니다. 스스로 믿음이 좋은 자들이라고 큰소리치면서, 온전히 하나님만을 위해 산다고 큰소리치면서 사실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사람의 힘으로 되는 일이 결코 아니라면, 진정 하나님만이 그런 역사를 일으키실 수 있다면 경비병을 세워놓는다고 해서 그것을 막아낼 수 있는 것입니까? 군인들 몇이 서서 칼과 창을 들고 막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막아낼 수 있는 것입니까?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막아내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경비병을 세움으로써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해 주었습니다. 그 누가 보아도 군인들이 지키는데 여자 제자들 몇이서 예수의 시신을 훔쳐갈 수는 없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그들은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는데 공을 세웠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두려워했던 일을 증언하는데 한 몫을 담당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종교의 이름으로 온갖 불의를 행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대개의 경우 종교지도자라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우고, 종교라는 간판을 내세웁니다마는 사실은 자기들의 기득권, 자기들의 소유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스스로 사탄의 종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바리새인들, 대제사장들, 백성의 장로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막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사탄의 종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종교의 이름으로 자기들의 부와 권력을 지키려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지키려는 것들은 결국 군인들이 무덤을 지키는 것처럼 허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키는 것은 결국 빈 무덤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고 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는 빈 무덤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에 아무 의미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빈 무덤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바로 그것을 깨뜨려버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빈 무덤과 같은 것이 아닌지 참으로 두렵습니다. 건물은 웅장하고 사람은 쏟아져 나오지만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에 아무 의미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빈 무덤과 같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수십 억, 수백 억 원씩 들여 땅 사고, 건물 짓고, 수십 대씩 대형버스를 돌리지만 하나님은 계실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두렵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과연 무엇을 지키고 있는지 우리는 심각하게 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과연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까? 내 삶 속에 주님이 살아계십니까? 공연히 빈 무덤 지키느라 애쓰지 말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참다운 제자로 거듭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