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06.9.17-10.4.18)/2009 년도

2009. 7. 26 / 십일조의 근본정신 / 마태복음 23:23-24

람보 2 2015. 4. 4. 21:38

십일조의 근본정신(2009. 7. 26)

 

본문) 마태복음 23:23-24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 눈 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나!” (표준새번역 개정판)

 

 

언젠가 큰아이한테 고모가 용돈 쓰라고 돈을 주었을 때 옆에서 지켜보던 제가 ‘십일조 먼저 떼라’라고 했더니 그 아이가 하는 말, “구약성경에는 십일조 내라는 말이 없다는데.” 그러니까 십일조 내는 것이 아깝다는 것이겠지요. 그렇잖아도 용돈이 적어서 늘 쩔쩔 매는데 모처럼 생긴 용돈에서 십일조 떼라니 아깝기도 하겠지요.

 

참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이 바로 십일조 헌금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십일조 헌금으로 자기의 부를 자랑할 수도 있습니다. 과천장로교회에서는 어느 집사님이 십일조 헌금을 무려 10억 원을 했답니다. 대공원 쪽에 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국가에 수용되면서 보상금을 받았기에 그 십일조를 한 것이지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저는 솔직히 너무나 부러웠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누구 보상금 받는 사람이 없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같이 들은 누군가가 그러더군요. “그 집사님 누군지 모르지만 금방 장로 되겠네.”

 

수입의 십분의 일을 헌금으로 낸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제가 부자로 살아본 적이 없어서 부자들의 입장은 잘 모르지만 요즘 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특히 수입이 넉넉하지 않아 늘 쪼달리는 사람들이 십일조 헌금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헌금이 십일조입니다. 그런 점에서 십일조 헌금은 분명히 믿음의 결단이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교인들이 십일조 헌금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 헌금을 통해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구약성경에 십일조가 나오지 않는가? 아닙니다. 십일조에 대한 계명은 여러 군데 나옵니다. 차근차근 찾아보겠습니다.

 

십일조 헌금의 기본은 레위기 27장에 나옵니다. 30-33절을 읽겠습니다.

“땅의 십분의 일 곧 땅에서 난 것의 십분의 일은, 밭에서 난 곡식이든지, 나무에 달린 열매이든지, 모두 주에게 속한 것으로서, 주에게 바쳐야 할 거룩한 것이다. 누가 그 십분의 일을 꼭 무르고자 하면, 그 무를 것의 값에다 오분의 일을 더 얹어야만 한다. 소 떼와 양 떼에서도, 각각 십분의 일을 나 주에게 거룩하게 바쳐야 한다. 목자의 지팡이 밑으로 짐승을 지나가게 하여, 열 번째 것마다 바쳐야 한다. 나쁜 것들 가운데서 좋은 것을 골라내거나 바꿔치기를 해서는 안 된다. 그가 꼭 바꾸어야만 하겠다는 생각으로 어떤 것을 바꾸었다면, 처음 그 짐승과 바꾼 짐승이 둘 다 거룩하게 되어, 도저히 무를 수 없게 된다.” (레위기 27:30-33)

 

여러분, 보십시오.

십일조 헌금으로 바쳐야 하는 것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땅에서 난 것의 십분의 일인데, 곡식이나 과일이나 다 수확한 것의 십분의 일은 주에게 바쳐야 할 거룩한 것입니다. 또한 소 떼와 양 떼에서도 열 마리마다 한 마리씩은 주님께 바쳐야 합니다. 34절에 이렇게 덧붙어 있으니 이 계명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더러,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고 내리신 명이다.”

 

신명기 14장에 가면 십일조를 내야 하는 것의 범위가 좀 더 확대됩니다.

“당신들은 해마다 밭에서 거둔 소출의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당신들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처음 난 소와 양의 새끼와 함께,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으로 가지고 가서, 주님 앞에서 먹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신명기 14:22-23)

 

그러니까 십일조로 바쳐야 하는 것은 곡식과 짐승의 십일조뿐만 아니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까지 드려야 하는 것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구절들은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농경사회에서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은 거룩한 것으로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치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에 십일조에 관한 가르침이 없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그렇다면 십일조는 왜 바치는 것인가? 즉 십일조는 어디에 쓰라고 바치는 것인가? 민수기 18장에 그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주님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제물로 받은 것, 이스라엘 자손이 거룩히 구별하여 나에게 바치는 것은, 모두 너에게 준다. 나는 그것들을, 너와 너의 아들들의 몫으로, 언제나 지켜야 할 규례로 준다.

다음은 아주 거룩한 것으로서, 너의 것이 될 것이다. 그들이 바친 모든 제물, 곧 그들이 나의 것이라고 하여 나에게 바친 온갖 곡식제물과, 그들이 바친 온갖 속죄제물과, 그들이 바친 온갖 속건제물 가운데서, 불태워서 바치고 남은 것은 아주 거룩한 것으로서, 너와 너의 자손이 받을 몫이다. 너는 그것을 아주 거룩한 곳에서만 먹도록 하여라. 그것은 남자들만 먹는다. 그것은 너에게 아주 거룩한 것이다.

다음은 너의 것이다. 즉 이스라엘 자손의 제물 가운데서, 들어 올려 바친 것과 그들이 흔들어 바친 것은 모두 너의 것이다. 그것들을 내가 너에게 딸린 아들딸들에게 영원한 분깃으로 주었으니, 너의 집에 있는 정결한 사람은 모두 그것을 먹을 수 있다. 가장 좋은 기름과 가장 좋은 포도주와 곡식과 그들이 나 주에게 바치는 첫 과일 모두를, 내가 너에게 준다. 그들의 땅에서 난 처음 익은 열매 가운데서, 그들이 나 주에게 가져 오는 것은 모두 너의 것이다. 너희 집에 있는 정결한 사람은 모두 그것을 먹을 수 있다. 이스라엘 안에서 나의 몫으로 바쳐진 것은 다 너의 것이다.‘ “ (민수기 18:8-14)

 

이 말씀은 주님께서 아론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아론이 누구입니까? 모세의 형으로서 이스라엘의 첫 번째 제사장입니다. 제사장들은, 그리고 그들이 속한 레위 지파는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땅을 나누어 가졌을 때 그것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따로 몫을 떼어 주셨으니 이것이 바로 제물로 들어오는 것들입니다. 열두 지파가 바친 것 중 불로 태워 바친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다 제사장들이 먹고 사는데 쓰라는 것입니다. 8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제물로 받은 것, 이스라엘 자손이 거룩히 구별하여 나에게 바치는 것은, 모두 너에게 준다. 나는 그것들을, 너와 너의 아들들의 몫으로, 언제나 지켜야 할 규례로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정적으로 12-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좋은 기름과 가장 좋은 포도주와 곡식과 그들이 나 주에게 바치는 첫 과일 모두를, 내가 너에게 준다. 그들의 땅에서 난 처음 익은 열매 가운데서, 그들이 나 주에게 가져 오는 것은 모두 너의 것이다. 너희 집에 있는 정결한 사람은 모두 그것을 먹을 수 있다. 이스라엘 안에서 나의 몫으로 바쳐진 것은 다 너의 것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친 십일조 예물을 포함하여 제물 가운데 불태워 바치고 남은 모든 음식은 제사장과 그의 집안사람들이 먹고 살아갈 수 있는 원천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시골에서 목회할 때 교인들이 추수한 쌀이나 온갖 채소를 가져다주어서 먹고 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참으로 고마웠던 분들이지요. 사실 지금도 그때가 그립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구절을 근거로 해서 어떤 목사님들은 십일조 헌금을 몽땅 다 가져다가 마음대로 쓰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뿐인가? 과연 십일조 헌금이 몽땅 제사장들이 먹고 살기 위해 사용되어져야 하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십일조의 참된 정신을 나타내는 구절입니다. 바로 신명기 14:28-29절입니다.

“당신들은 매 삼 년 끝에 그 해에 난 소출의 십일조를 다 모아서 성 안에 저장하여 두었다가, 당신들이 사는 성 안에,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레위 사람이나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십시오. 그러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당신들이 경영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신명기 14:28-29)

 

여러분, 잘 보십시오.

매 삼 년 끝에, 그러니까 삼 년에 한 번씩 그 해에 난 소출의 십일조는 다 모아서 성 안에 저장해 두라는 것입니다. 그것 가지고 성 안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레위 사람이나 떠돌이나 고아나 괴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삼 년에 한 번씩은 십일조를 모아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데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께서 당신들이 경영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일조는 마땅히 믿음의 고백으로 내는 것이며, 그것으로 제사장은 물론이요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와 같이 살기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데 써야 합니다. 그러니까 십일조 헌금으로 교회만 커지거나 제사장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약한 자들을 보호하고 지키는데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이제 이러한 것을 배경으로 오늘의 본문을 살펴봅시다. 예수님 당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분명히 십일조 헌금을 정확히 바쳤습니다. 그들은 곡식, 포도주, 기름, 소나 양의 십일조를 분명히 바쳤습니다. 그들은 심지어는 그것들뿐만 아니라 박하와 회향과 근채와 같은, 구약성경에 바치라고 나와 있지 않은 향료들의 십일조까지 또박또박 바쳤습니다. 물론 그들은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십일조를 바친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십일조의 근본정신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신명기 14장에 나오는 것이요, 그것을 요약한 것이 바로 정의와 자비와 신의입니다.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러니까 진짜 중요한 십일조의 정신은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는 십일조를 바친다고 큰소리치면서 정의도 버리고, 자비도 없고, 신의도 저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큰소리칠 것이 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정의, 자비, 신의는 무엇을 말합니까?

 

우선 정의란 엄밀히 말하면 ‘공정한 재판’을 뜻합니다. 일찍이 여러 예언자들을 통해 깨우쳐주신 말씀입니다. 구약 세 군데를 읽겠습니다.

 

“주님께서 스가랴에게 말씀하셨다.

‘나 만군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공정한 재판을 하여라.

서로 관용과 자비를 베풀어라.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가난한 사람을 억누르지 말고,

동족끼리 해칠 생각을 하지 말아라.‘ “ (스가랴서 7:8-10)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가면 됩니까?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을 드리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허물을 벗겨 주시기를 빌면서,

내 맏아들이라도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면서,

이 몸의 열매를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서 6:6-8)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아모스서 5:21-24)

 

자비 역시 고아와 과부, 떠돌이 그리고 차지할 몫이 없는 제사장들에게 필요한 것을 베풀어주는 것이며, 신의란 하나님께 대한 변치 않는 신앙과 주위 사람들에게 변치 않는 성실성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십일조 헌금을 바치고, 그것은 다시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쓰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 헌금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가장 근본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일조는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많이 바친다고 큰소리칠 것도 없고, 적게 바친다고 부끄러워 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대로 십일조를 드리면 됩니다. 단, 정의를 이루기 위한 마음, 부족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는 자비, 모든 관계에 충실한 신의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 바치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정의, 자비, 신의가 없다면 그래서 십일조 많이 바쳐서 내가 더 많은 복을 받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그야말로 잘못된 것입니다. 그야말로 단순한 소경놀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분명 철저한 십일조를 바쳤지만 거기에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가 빠졌기에 그들은 눈 먼 인도자들이었으며,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이 되고 만 것입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에 보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심지어 모든 음료수를 마실 때마다 천으로 걸러 내어 마셨는데, 그 이유는 음료수에 벌레가 빠져 있을 수 있고 그 벌레들 가운데는 사람이 먹을 수 없는 불결한 것들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는 저버렸기에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일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레위기 11장 4절에 나오는 대로 낙타는 불결한 짐승이기에 먹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십일조를 바친다고 큰소리치면서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더 탐욕스럽고, 불결하고, 죄악으로 가득친 자들이었으니 한 마디로 위선자들이요, 저주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일조의 참된 정신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되새기면서 우리의 정성스러운 십일조를 통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