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06.9.17-10.4.18)/2009 년도

2009. 3. 8 /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 마태복음 19:16-22

람보 2 2015. 4. 3. 19:09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2009.3.8)

 

본문) 마태복음 19:16-22

“그런데 한 사람이 예수께 다가와서 물었다.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는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한 분은 한 분이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기를 원하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가 예수께 물었다. ‘어느 계명들을 지켜야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말아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그 젊은이가 예수께 말하였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다 지켰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근심을 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표준새번역 개정판)

 

 

오늘의 본문은 공관복음서, 즉 마태, 마가, 누가복음 세 군데에 모두 다 나오기에 제법 유명한 내용이고, 따라서 우리는 그 내용을 대개 알고 있습니다. 저도 이미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강해설교를 했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미 이 본문을 갖고 제가 한 설교를 두 번이나 들은 셈입니다.

 

어떤 부자 젊은이가, 누가복음에 의하면 지도자라고 번역되어 있는 관리가 예수를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그러니까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주인공은 젊은 나이에 부자이면서 일찍이 관직에 올라 출세한 사람입니다. 세상적인 조건으로 보면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만족하며 살만한 사람이고, 더 바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참으로 기특하게도 종교적인 갈망까지 갖고 있습니다. 그는 묻습니다.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께서 그에게 계명들을 지켰느냐고 물으셨고, 그가 자랑스럽게 다 지켰다고 대답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0장 21절에는 심지어 이런 표현까지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그래서 그 젊은이는 아주 당당하게 예수께 말하였습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다 지켰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무슨 말입니까?

나는 모세를 통해 가르쳐준 모든 율법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부족한 것이 없고, 따라서 마땅히 영원한 생명을 얻을 만 하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아주 자랑스러운, 당당한, 거리낄 것 없는 모습입니다. 그야말로 “나는 완전하다”는 선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청년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그래, 너는 완전하다. 너는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실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보란 듯이 큰소리치며 집으로 갈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 젊은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근심을 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 젊은이는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함으로써 이미 구약에 정통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분명히 구약은 인간이 죄를 피해야할 뿐만 아니라 또한 선한 일을 행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일찍이 예언자 아모스는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너희가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아라.

너희 말대로 주 만군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와 함께 계실 것이다.

행여 주 만군의 하나님이

남아 있는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실지 모르니,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여라.

법정에서 올바르게 재판하여라.“ (아모스서 5:14-15)

 

그런데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선은 곧 계명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계명을 지키면 선이요, 지키지 않으면 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들은 계명을 다 지키니까 선한 백성이요, 구원받을 백성이며 이방인들이나 율법을 지키지 않는 무리들은 율법을 알지도 못하거나 알아도 지키지 않기에 악한 백성이요, 멸망받을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께서도 잘 아시기에 이렇게 대답하신 것입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기를 원하면, 계명들을 지켜라.”

 

물론 구약에 나오는 계명을 대표하는 것이 십계명입니다. 그러니까 계명을 지키라는 말은 곧 십계명을 지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십계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지요. 1~4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것이요, 5~10계명은 인간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1~4계명을 다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실 것 같은데 예수께서는 뜻밖에도 5~10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구약에 나오는 십계명과 약간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예수께서는 인간관계를 다룬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고, 그 젊은이는 다 지켰다고 큰소리쳤습니다.

 

자, 이제 여기서 우리는 이야기의 핵심에 접근합니다. 그 젊은이가 모든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했을 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는 각각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가복음 10:21)

“네게는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누가복음 18:22)

 

그러니까 마가와 누가는 같습니다.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그 구절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여러분!

얼핏 보면 세 복음서에 나오는 부자청년 이야기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 복음서의 내용이 서로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마가와 누가에는 예수를 “선하신 선생님”이라고 불렀는데, 마태에는 그냥 “선생님”이라고 불렀다든지, 지키라는 계명의 종류와 순서가 서로 조금씩 다르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세 복음서를 비교하면서 가장 근본적인,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의 기사가 강조하는 것이 두드러지게 다르도록 만드는 하나의 단어가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이라는 문장에 나오는 “완전한”이라는 단어입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이 단어 하나를 집어넣음으로써 마가나 누가와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로 바꾸어버렸습니다.

 

 

여러분!

단순히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지요. 여기 나오는 “완전한”이라는 단어는 희랍어 “teleios”인데 복음서 네 권을 통틀어 다른 곳에는 일체 나오지 않고 오로지 마태복음에만 단 세 번 나옵니다. 그중 하나가 오늘의 본문이고 나머지 둘이 그 유명한 마태복음 5장 48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그렇다면 “완전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도대체 인간이 어떻게 하면 완전해질 수 있는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처럼 완전해질 수 없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우리들에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며, 오늘의 본문에서 젊은이에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이라고 해서 사람이 완전해질 수 있는 것처럼 말씀하신 것인가요? 도대체 인간이 완전해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완전하다고 인정해 주시는 길을 열어놓으셨으니 그것이 마태복음 5장과 오늘의 본문입니다. 그러므로 두 군데 본문이 하고 싶은 말씀이 결국은 같습니다.

 

산상수훈 설교할 때 말씀드렸습니다마는 마태복음 5장 48절의 말씀은 적어도 그 앞에 있는 5장 43-47절의 말씀과 6장 1-4절까지의 말씀의 흐름 속에서 보아야 합니다. 성경책에 5장 48절에 “완전하라”는 단어가 나오고 끊어진 후 6장으로 넘어가니까 이것을 전혀 다른 단락으로 생각하고,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원래 성경에는 장절의 구분이 없었고, 따라서 다 이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절이 구분되어 있다고 해서 내용조차 끊어진 것으로 보면 안 됩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5장과 6장을 이어놓고 보아야 합니다.

5장 43-47절에서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은 바로 네 이웃만 사랑하지 말고, 네 원수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형제자매들하고만 인사하지 말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하고도 인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네 원수도 사랑하는 것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 사랑의 구체적인 징표로 말씀하신 것이 바로 6장 1-4절에서 가르쳐 주신 바 자선입니다. 이웃만 사랑하지 말고 원수까지 사랑하는데 말로만 사랑하지 말고 가진 것을 나누고 베푸는 것으로 사랑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베풀 때 동네방네 떠들지 말고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완전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것과 똑같이 오늘의 본문에도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이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완전에 이르는 길은 바로 자기가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보화를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을 따르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부자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했습니다. 모든 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 일체 한 적이 없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했습니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는 말씀도 지켰습니다. 그는 어쩌면 계명을 다 지켰다는 점에서는 열두 제자들보다 앞서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께서 제시하신 결정적인 조건, 곧 “네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라는 조건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근심을 하면서 떠나갔습니다.

 

이제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분명히 그 부자청년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라는 계명까지 다 지켰다고 대답했는데, 그렇다면 그가 이웃을 사랑한 방법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냥 말로만 사랑했다는 것인가, 아니면 거기서 말하는 이웃이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말한 것처럼 “유대인들만”을 의미하는가? 오늘의 본문 어디에도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마는 분명한 것은 그가 자기의 재산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은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그 재산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분명히 율법을 다 지켰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지만 그러나 그의 속마음은 자기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것이 “많은 재산”이라고 믿었지 결코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근심하며 떠나갔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결국 그가 믿은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많은 재산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결국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처분하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걸어갈 길을 “하늘의 보물”로 갚아주실 것을 믿으면서, 우리의 안락한 생활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예수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근심을 하면서 떠나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제자들도 대뜸 걱정스러운 질문을 하는 것이 다음의 본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큰아이가 여섯 살 때, 제가 부목사로 근무할 때인데 우리는 방배동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교회 근처 유치원에 보냈습니다. 2년을 보내야 했는데 유치원 등록금이 비싸서 1년 반을 보내고 더 이상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유치원에는 이사간다고 말하고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큰아이는 유치원 졸업장이 없습니다.

그러고 난 후 참으로 제 자신이 한심했습니다. 아이를 유치원에도 보내지 못하다니? 앞으로 크면 어떻게 교육을 시킨단 말인가? 그래서 궁리 끝에 택한 방법, 두 아이 이름으로 적금을 붓는 것이었습니다. 어찌어찌해서 마침내 두 아이 이름으로 된 통장을 만들게 되었을 때 참으로 기뻤습니다.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그 통장을 손에 꼭 쥐고 은행문을 나서면서 제가 그랬습니다.

“이제 걱정없다. 이 적금만 열심히 부으면 우리 아이들의 장래는 이 통장이 지켜줄 거다.”

 

그런데 여러분!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혼자 있게 되었을 때 제 마음 속에 한 가지 물음이 떠올랐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저에게 물으셨습니다.

“목사인 네가 지금 네 아이들의 일생을 누구한테 맡기는 거냐? 하나님이냐, 통장이냐?”

순간적으로 저는 소스라쳐 놀랐습니다. 그것은 내 아이들의 일생을 맡아주시는 분이 하나님이 아니고 돈이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목사인 내가 믿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한참을 눈물 흘렸습니다. 그리고 회개했습니다.

그때 만든 통장 두 개, 그것들은 얼마 후 제가 개척교회를 시작할 때 해약해서 다 써버렸습니다. 그것만 지금까지 잘 부어왔더라면 큰아이 대학 등록금 때문에 지금 이렇게 고생하지 않겠지요?

 

부자 청년은 계명을 다 지켰다고 큰소리치기는 했지만 그는 결코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재산을 믿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가? 그 답이 다음 주 본문에 나옵니다.

끝으로 예수께서 그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이 단순한 권고가 아니라 명령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권고가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 하는 명령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과연 이 시간 우리에게는 뭐라고 말씀하실까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는 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대답을 들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질문을 하고, 주님의 대답을 듣는, 그리고 그 대답을 따라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