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06.9.17-10.4.18)/2008 년도

2008. 8. 31 / 훈련받은 제자들 / 마태복음 13:51-53

람보 2 2015. 4. 3. 16:51

훈련받은 제자들/2008.8.31


본문) 마태복음 13:51-5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이것들을 모두 깨달았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예’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를 위하여 훈련을 받은 율법학자는 누구나, 자기 곳간에서 새 것과 낡은 것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예수께서 이 비유들을 말씀하신 뒤에, 그곳을 떠나셨다.”   (표준새번역 개정판)




이제 우리는 마침내 13장에 나왔던 일곱 개의 비유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기억을 정리하기 위해서 일곱 개의 비유를 되돌아보면 그것들은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보아라, 씨를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다가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심었다.”

“하늘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가루 서 말 속에 살짝 섞어 넣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놓은 보물과 같다.”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

“또 하늘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던져서 온갖 고기를 잡아 올리는 것과 같다.”


결국 일곱 개의 비유는 모두 다 하늘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무엇무엇과 같다”는 것이 비유가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 말씀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이것을 모두 깨달았느냐?”

그러니까 예수께서 비유를 일곱 개 씩이나 들어가며 가르치려고 하셨던 가르침이 무엇인지, 무슨 뜻인지 깨달았느냐는 물음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예.”


여기 본문에 “예”라고 나와 있는 것은 사실은 “예, 다 깨달았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자들이 깨달았다는 것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우선 앞의 네 비유에 나오는 것처럼 하늘나라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이 밭에 나가 씨를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밭에 씨앗을 뿌렸으니 때가 되면 싹이 나올 것입니다. 그래서 그야말로 새로운 생명이 자랄 것입니다. 그 씨앗은 지금 겨자씨와 같이 아주 작고 미미하고 보이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커다란 씨앗이라도 일단 땅 속에 묻고 나면 흙으로 덮어야하기에 덮고 나면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땅 속에 묻혀서 다 죽을 것 같은데 거기서 생명이 싹트고 자라서 크고 우람한 나무처럼 자라날 것입니다. 그리고 누룩이 밀가루 반죽 속에 들어가 스스로를 녹임으로써 밀가루를 부풀게 하고 맛있는 빵이 되게 하는 것처럼, 그리고 많은 사람이 그것을 먹고 힘을 얻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 속에 들어왔고, 자라나 세상을 변화시키고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을 나누어주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가르침을 제자들이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늘나라는 숨겨진 보물과 같다는 것입니다. 밭에 묻힌 보물이나 좀처럼 눈에 띠지 않는 진주같이 숨어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손에 쥐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사람들은 하늘나라의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주님은 가르쳐 주셨고, 제자들은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 하늘나라의 보화를 차지할 것인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보화를 차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지금은 다 뒤섞여서 모두 다 하늘나라의 보화를 차지할 것처럼 보이지만 때가 되면 그물에 잡힌 고기를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누듯이, 의인들과 악인들이 구분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여러분, 바다에 가면 고기가 아주 많습니다. 제가 즐겨보는 다큐멘타리 프로그램을 보면 바닷물 속에는 진짜 고기들이 많습니다. 그 많은 고기들 중에 사실 그물에 잡혀 올라오는 고기는 극히 일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일단 그물에 잡힌 고기란 교회 안에 들어와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물에 잡힌 고기는 무조건 다 좋은 고기냐? 아니라는 겁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다 좋은 사람들이고 다 구원받을 사람들이냐“ 아니라는 겁니다. 교회 안에도 의인과 악인이 섞여 있다는 겁니다. 그물 안에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섞여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모두 다 하늘나라의 보화를 차지할 것이냐? 아닙니다. 때가 되면 어부가 그물에 잡힌 고기를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누듯이 반드시 의인과 악인이 구분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래서 의인은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악인들은 불구덩이에 들어간다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해서 일곱 개의 비유는 하늘나라에 대한 완전한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바로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다 깨달았다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를 위하여 훈련을 받은 율법학자는 누구나, 자기 곳간에서 새 것과 낡은 것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여러분,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지금까지 비유에 대한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으신 예수께서 그 비유 이야기를 마무리하시면서 또 다시 비유 같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를 위하여 훈련을 받은 율법학자는 누구나, 자기 곳간에서 새 것과 낡은 것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사실 우리가 오늘 읽은 52절의 말씀은 신약성경의 말씀 중 참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우선 “하늘나라를 위하여 훈련을 받은 율법학자는”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원래 율법학자란 유대교에서 율법을 공부하고, 해석하고, 가르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이 율법학자들을 보통 사람들이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선생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믿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워낙 공부를 많이 했고 율법에 정통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율법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도 없고, 그 어떤 율법학자의 제자도 되지 않았던 예수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들은 박사학위까지 받은 정통학자들인데 어디 가서 공부도 하지 않은 예수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율법에 대해서 가르친다고 하니 기분이 나빴던 것입니다.

“너 어디 가서 학위 받았는데?”   “학위 없는데.”

“너 어디 유학 갔다 왔는데?”  “유학 간 적 없는데.”

“그런데 네가 무슨 율법을 가르쳐.”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율법학자들 중에 예수를 믿고 제자가 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위하여 훈련을 받은 율법학자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 바로 마태복음 23장에 그 증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을 펴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기념비를 꾸민다. 그러면서, ‘우리가 조상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피 흘리게 하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죽인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조상의 분량을 마저 채워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심판을 피하겠느냐?” (마태복음 23:29-33) 


여기까지 보면 이 구절은 예수님 당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죄악에 대한 엄청난 꾸중입니다. 그런데 34절에 보면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언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율법학자들을 너희에게 보낸다. 너희는 그 가운데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십자가에 못 박고, 더러는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 저 동네로 뒤쫓으며 박해할 것이다.”


보십시오!

분명히 29절에도 율법학자들이 나오고 34절에도 율법학자들이 나오는데 29절에 나오는 율법학자들과 34절에 나오는 율법학자들은 다릅니다. 29절에 나오는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박해하고 핍박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34절에 나오는 율법학자들은 예수가 보낸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학자들을 앞에 나온 율법학자들이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십자가에 못 박고, 더러는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 저 동네로 뒤쫓으며 박해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율법학자라고 다 같은 율법학자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율법학자들은 꾸중을 듣고 심판의 경고를 받았지만  율법학자들 중에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기도 하고, 회당에서 채찍질에 얻어맞기도 하고, 이 동네 저 동네로 쫓겨 다니며 박해를 당하는 율법학자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율법학자들을 주님은 “하늘나라를 위하여 훈련을 받은 율법학자”라고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율법학자들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 다음에 무엇을 했는가?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율법학자는 누구나, 자기 곳간에서 새 것과 낡은 것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도시의 아파트들은 그렇지 않지만 시골집에 가면 어디나 곳간이 있어서 온갖 기구들이 들어 있습니다. 낡은 것, 새것 가리지 않고 들어 있습니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서 기구들을 꺼내어 씁니다. 새것이 필요할 때는 새것을 꺼낼 것이고, 낡은 것이 필요할 때는 낡은 것을 꺼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율법학자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원래 율법학자들은 성경, 즉 구약에 정통한 사람들입니다. 오로지 구약만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구약의 말씀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어야 하는 것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구약만 붙잡고 매달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약이 담고 있는 비밀, 즉 하나님의 나라가 약속되었고 그것이 예수에게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한 율법학자들은 이제 율법을 보는 새로운 눈을 발견했습니다. 율법이 비밀로 담고 있던 새로운 세상을 보았습니다. 바로 메시아가 올 것이라는 예언의 비밀, 예수가 구약의 성취라는 사실 그리고 예수가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다는 위대한 신비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새 것 즉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말씀과 낡은 것 즉 모세 오경이 갖고 있는 율법 둘 다를 꺼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만난 제자들은, 특히 예수를 만난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과 행적에 비추어 구약성경과 율법을 풀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를 위하여 훈련을 받은 율법학자는 누구나, 자기 곳간에서 새 것과 낡은 것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자, 이제 여기서 우리는 성경을 보는 눈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구약은 예수를 예비하는 말씀이요, 비밀이 담겨있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복음과 행적이 담겨있는 신약은 예언의 성취요, 구약의 완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구약과 신약을 함께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 설교를 잘 들으시면 저는 분명히 복음서라는 신약을 주로 보고 있는데 그 복음서와 관계되는 구약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찾고 있음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바 “하늘나라를 위하여 훈련을 받은 율법학자”가 있다면 구체적으로 과연 누구인가? 성경에 그런 인물이 누가 있는가? 있습니다. 한 사람 있습니다. 바로 마태복음 저자 자신입니다. 마태복음 저자 자신이 바로 “훈련을 받은 율법학자”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가 이미 지금까지 마태복음의 맨 처음부터 살펴온 것이지만 마태만큼 철저하게 구약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예수의 모든 행적과 말씀을 기록해 놓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 사람만 그렇습니다.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마는 그는 아예 1장 1절부터 그렇게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이러하다.”


아기 예수가 태어날 때 있었던 그 모든 신비스러운 일들은 다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이르시기를,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라고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1:22-23)


그 유명한 산상수훈은 철저하게 모세의 율법과 비교하여 가르쳐 주신 하늘나라의 헌법입니다. 우리가 마태복음을 읽노라면 거의 모든 구절에서 예언의 성취라는 표현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일어났던 모든 일들도 마태복음에 의하면 철저하게 구약에서 미리 말씀되어졌던 일들의 성취였습니다. 시편 22편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어찌하여 그리 멀리 계셔서,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나의 간구를

듣지 아니하십니까?“  (시편 22:1)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외치신 말씀, 바로 마태복음에만 나옵니다. 7-8절을 보겠습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누구나

나를 빗대어서 조롱하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면서

얄밉게 빈정댑니다.

‘그가 주님께 그토록 의지하였다면,

주님이 그를 구하여 주시겠지.

그의 주님이 그토록 그를 사랑하신다니,

주님이 그를 건져 주시겠지‘ 합니다.“  (시편 22:7-8)


그렇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마태복음 전체를 통해 마태복음 저자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유일한 구절입니다. 바로 마태복음 저자 자신이 “하늘나라를 위하여 훈련 받은 율법학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마태복음 저자는 우리에게 성경을 보는 방법을 깨우쳐 줍니다. 그것은 바로 구약은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언이요, 신약은 예언의 성취이자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향해서 늘 구약과 신약을 함께 보면서 우리의 신앙을 키워나가라고 깨우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는 과정은 바로 하늘나라를 위하여 훈련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말씀을 깊이 배워 깨닫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깨우쳐가는, 그래서 하늘나라를 위하여 훈련을 받는 과정인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훈련받은 제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깨닫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우리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그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의 말과 삶으로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오늘의 본문을 통해 자기가 하늘나라를 위하여 훈련을 받은 제자가 된 것처럼 우리도 그런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소명을 받았다고 깨우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소명을 깨닫고 늘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고, 깨우치고, 살아가며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