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06.9.17-10.4.18)/2008 년도

2008. 7. 20 / 희망의 선포 / 마태복음 13;31-32

람보 2 2015. 4. 3. 16:33

희망의 선포 / 2008. 7. 20


본문) 마태복음 13:31-32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심었다. 겨자씨는 어떤 씨보다 더 작은 것이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 더 커져서 나무가 된다. 그리하여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  (표준새번역 개정판)



오늘의 본문은 너무나 짧고 간단해서 누구나 쉽게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심었습니다. 그런데 겨자씨는 어떤 씨보다 더 작은 것이니까 사람들은 그까짓것 심어봤자 얼마나 자라겠느냐고 비웃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기가 막히게도 겨자씨는 자라면 어떤 풀보다 더 커져서 나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지가 뻗고 잎사귀들이 자라서 풍성한 나무가 되면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는 것입니다.


무슨 특별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지 않습니다. 겨자씨라고 하는 작은 씨앗과 아주 큰 나무를 비교한 것이고, 그러니 이 비유는 곧 하늘나라는 아주 작게 시작하지만 마침내 아주 커질 것이라는 말씀을 잘 드러내신 비유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희망을 갖고 열심히 신앙생활하면 되는 것이라고 주님은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오늘의 설교 끝.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이 본문이 그렇게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제부터 다시 본격적으로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우선 오늘의 본문에는 정확하지 않은 표현이 두 가지 들어 있습니다. 32절에 보면 “겨자씨는 어떤 씨보다 더 작은 것이지만”이라고 되어 있는데 사실은 겨자씨보다 더 작은 것이 난초 씨앗입니다. 그 다음에 “자라면 어떤 풀보다 더 커져서 나무가 된다” 라고 되어 있는데 겨자씨가 자라면 풀 중에서 가장 큰 풀 중의 하나만큼 자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나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겨자는 씨를 뿌리면 겨우내 자라서 4월이 되면 3.5~4m 정도까지 자랍니다. 그러니까 풀 치고는 굉장히 크게 자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겨자는 흔히 겨자나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일년생이기에 정확히 말하면 풀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기자는 이것을 정확히 표현해 놓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길까? 또는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겨자씨와 같으니, 그것은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에 있는 어떤 씨보다도 더 작다. 그러나 심고 나면 자라서, 어떤 풀보다 더 큰 가지들을 뻗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마가복음 4:30-32)


그렇다면 마태복음 기자는 왜 가장 작은 씨앗인 난초 씨앗을 예로 들지 않고 겨자씨를 갖고 비유를 삼았을까요? 그것은 물론 겨자가 난초 씨앗과는 달리 아주 작은 씨앗과 크게 자라는 풀이라는 비교를 통해 하늘나라를 나타내는데 유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기자가 겨자를 풀이 아닌 나무로 잘못 알았던 것인가요? 아닙니다.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마는 의도적으로 “큰 나무”라는 표현을 통해서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구약에서 일찍이 말했던 바, 즉 구약성경의 예언들이 말하고 있었던바 종말적인 메시아 왕국에 대한 구약성경의 예언들에 맞추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쓴 표현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구약성경에서는 흔히 위대한 왕을 ‘큰 나무’로 표현하고, 그 나무의 ‘그늘’과 ‘가지들’은 왕의 보호권 또는 통치권을 나타내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우선 에스겔서의 말씀을 봅시다.

제 십일 년 셋째 달 초하루에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이집트 왕 바로와 그의 무리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너의 위엄찬 모습을 누구와 비할 수 있겠느냐?

앗시리아는 한때 레바논의 백향목이었다.

그 가지가 아름답고,

그 그늘도 숲의 그늘과 같았다.

그 나무의 키가 크고,

그 꼭대기는 구름 속으로 뻗어 있었다.


너는 물을 넉넉히 먹고 큰 나무가 되었다.

깊은 물줄기에서 물을 빨며 크게 자랐다.

네가 서 있는 사방으로는

강물이 흐르고, 개울물이 흘러,

들의 모든 나무가 물을 마셨다.

너는 들의 모든 나무보다 더 높게 자랐다.

흐르는 물이 넉넉하여

굵은 가지도 무수하게 많아지고,

가는 가지도 길게 뻗어 나갔다.

너의 큰 가지 속에서는

공중의 모든 새가 보금자리를 만들고,

가는 가지 밑에서는

들의 모든 짐승이 새끼를 낳고,

그 나무의 그늘 밑에서는

모든 큰 민족이 자리 잡고 살았다.‘ “ ”   (에스겔서 31:1-6)


여러분!

이 구절은 이집트 왕 바로를 앗시리아와 비교하면서 바로가 얼마나 위대한 왕이며, 또 그 통치권이 얼마나 큰지를 자랑하는가를 보여줍니다. 물론 뒤에 가면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셨지만 어쨌든 바로의 힘과 권력은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나타날 만큼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예언자 다니엘은 꿈을 통해 느부갓네살 왕이 얼마나 위대하고 그 권력이 강했는지를 보았습니다.

“내가 침대에 누워 있을 때에, 나의 머리 속에 나타난 환상은 이러하다. 내가 보니, 땅의 한가운데 아주 높고 큰 나무가 하나 있는데, 그 나무가 점점 자라서 튼튼하게 되고, 그 높이가 하늘에 닿으니, 땅 끝에서도 그 나무를 볼 수 있었다. 나무는 잎이 무성하여 이름답고, 열매는 온 세상이 먹고도 남을 만큼 풍성하였다. 들짐승이 그 그늘 아래에서 쉬고, 그 큰 나무의 가지에는 하늘의 새들이 깃들며, 모든 생물이 그 나무에서 먹이를 얻었다. . . . . . . . . . . .

‘임금님, 그 나무는 바로 임금님이십니다. 임금님은 강대해지셨습니다. 임금님의 강대함이 하늘에 닿았고, 임금님의 통치가 땅 끝까지 이르렀습니다.’ “ (다니엘서 4:10-12, 22)


물론 지금 보았던 큰 나무 둘은 위세를 떨치던 이방인의 왕들을 가리키지만 구약성경에는 종말의 때에 세워질 이스라엘 민족의 메시아 왕국을 나무에 비긴 곳도 있습니다.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백향목 끝에 돋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겠다.

내가 그 나무의 맨 꼭대기에 돋은

어린 가지들 가운데서 연한 가지를 하나 꺾어다가,

내가 직접 높이 우뚝 솟은 산 위에 심겠다.

이스라엘의 높은 산 위에

내가 그 가지를 심어 놓으면,

거기에서 가지가 뻗어 나오고,

열매를 맺으며,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다.

그 때에는

온갖 새들이 그 나무에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들이 그 가지 끝에서

보금자리를 만들 것이다.“  (에스겔서 17:22-23)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메시아 왕국을 세울 터인데 그 나라는 마치 아름다운 백향목과 같아서 온갖 새들이 그 나무에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들이 그 가지 끝에서 보금자리를 만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시편 기자는 야훼께서 다스리시는 이상적인 세계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주님은,

골짜기마다 샘물이 솟아나게 하시어,

산과 산 사이로 흐르게 하시니,

들짐승이 모두 마시고,

목마른 들나귀들이 갈증을 풉니다.

하늘의 새들도 샘 곁에 깃들며,

우거진 나뭇잎 사이에서 지저귑니다.

누각 높은 곳에서 산에 물을 대주시니,

이 땅은 주님께서 내신 열매로 만족합니다.


주님은,

들짐승들이 뜯을 풀이 자라게 하시고,

사람들이 밭갈이로 채소를 얻게 하시고,

땅에서 먹거리를 얻게 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포도주를 주시고,

얼굴에 윤기가 나게 하는 기름을 주시고,

사람의 힘을 북돋아주는 먹거리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심으신 나무들과 레바논의 백향목들이

물을 양껏 마시니,

새들이 거기에 깃들고,

황새도 그 꼭대기에 집을 짓습니다.“  (시편 104:10-17)


그렇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큰 나무” 그리고 “그 가지와 그늘에 공중의 새들이 깃들인다”는 표현은 단순히 눈 앞에 보이는 나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질 구원의 현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여기서 “공중의 새들”은 세상 만민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나타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오늘 본문으로 삼은 31-32절은 아주 짧은 구절이지만 그 짧은 구절 속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이방인들까지도 하나님이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놀라운 뜻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보았던 성경구절들에 나오는 큰 나무들은 대개 백향목을 나타내지 결코 겨자씨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백향목이라고 번역된 나무는 흔히 삼나무 또는 송백나무라고도 부르는데 성경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위세 있는 나무로 여겨집니다. 백향목은 지혜의 왕 솔로몬이 아는 나무 중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였고, 동시에 가지도 넓게 뻗어내는 나무였습니다. 아쉽게도 솔로몬 당시의 백향목들은 지금 다 없어졌지만 그 변종들이 히말라야 산맥 밀림 속에 남아 있는데 큰 것은 약 80m 높이에 지름이 12m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백향목은 나무도 단단하고 강할 뿐만 아니라 이름을 보아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향기도 많이 뿜어져 나오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것으로 성전, 제단, 궁궐을 짓는데 사용했습니다. 그러니 시편 기자가 백향목을 권세의 상징으로 나타낸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의인은 종려나무처럼 우거지고,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높이 치솟을 것이다.“  (시편 92:12)


그렇습니다.

이제 예수께서 하늘나라의 권세를 나타내려 했다면 당연히 백향목을 예로 들었어야 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겨자씨의 비유가 아니라 백향목의 비유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백향목이 아니라 겨자씨라니요?


예수께서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그것을 들은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겨자씨란 ‘작음’, ‘변변치 못함’ 등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예수 자신도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뽕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기어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 ”   (누가복음 17:6)  

여기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란 결코 보잘 것 없는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도대체 예수께서는 왜 백향목이라는 좋은 나무, 전통적으로 깊은 의미를 갖고 있는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겨자씨라고 하는 지극히 작고 변변치 못한 작은 씨앗을 사용하셨던가요?

왜냐하면 오늘의 비유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는 달리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향해서 적대적인 행동을 취하는 사람들을 향한 공격적인 비유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비유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파나 에세네파 같은, 사두개파나 헤롯당과 같은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은 겨자씨와 같이 작고, 변변치 못한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 제자들도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계속 나온 것처럼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 운동은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비웃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모욕했습니다.

“배운 것도 없는 놈들, 가진 것도 없는 놈들, 율법도 지키지 않는 놈들, 끊임없이 안식일을 어기는 놈들, 네 까짓 것들이 무슨 하나님의 나라를 이룬다고?” 그래서 제자들은 끊임없이 좌절과 회의에 빠져들어 갔습니다. 심지어 요한복음 6장 6절에는 이런 기록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 때문에 제자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떠나갔고, 더 이상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물으셨다. ‘너희까지도 떠나가려느냐?’”


자, 이제 필요한 것, 많은 사람들이 떠나가고 남은 제자들마저 흔들릴 것 같은 상황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은 바로 위로와 격려와 확신을 심어주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심었다. 겨자씨는 어떤 씨보다 더 작은 것이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 더 커져서 나무가 된다. 그리하여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겨자씨가 처음에 땅에 뿌려질 때에는 세상에 있는 모든 씨앗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것이듯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도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지극히 미미하고 보잘 것 없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실족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씨앗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겨자씨가 그 안에 장차 모든 푸성귀 가운데서 가장 큰 ‘나무’가 될 가능성을 이미 갖고 있는 것처럼 지금 우리의 이 하나님 나라 운동은 확실히 세상의 모든 백성을 다 포용하는 구원의 공동체로 완성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비유는 이런 점에서 희망의 선포입니다. 기쁨의 선포입니다. 용기의 선포입니다.


끝으로 그렇다면 하나님의 니라는 저절로, 점진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인가? 아닙니다. 겨자씨 비유를 소개하고 있는 세 복음서의 내용 그 어디에도 겨자씨가 자라는 과정이 소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비유는 단지 현재의 지극히 초라해 보이는 모습과 장래의 영화스러움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관계로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거기에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심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심었다”는 이 표현은 겨자씨가 자연발생적인 과정으로 번식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뿌리는 활동을 나타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 운동은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서 이루어져 가는 것을 나타낸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솔직히 말해 작고 변변치 못한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이 시작한 운동은 너무나 보잘 것 없고, 도무지 성공할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자라면 어떤 풀보다 더 커져서 나무가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용기를 잃지 말고 희망을 품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겨자씨를 뿌리는 농부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아무 힘도 없고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위한 희망의 씨앗, 사랑의 씨앗, 정의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반드시 큰 나무로 자라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희망을 갖고 힘차게 일어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