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06.9.17-10.4.18)/2008 년도

2008. 6. 15 / 참된 가족 / 마태복음 12:46-50

람보 2 2015. 4. 3. 16:10

참된 가족 / 2008. 6. 15.


본문) 마태복음 12:46-50

“예수께서 아직도 무리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와 말을 하겠다고 바깥에 서 있었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선생님과 말을 하겠다고 바깥에 서 있습니다.’ 그 말을 전해 준 사람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누가 나의 어머니이며, 누가 나의 형제들이냐?’ 그리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고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나의 어머니와 나의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 (표준새번역 개정판)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서 아주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 애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누구에게든지, 무슨 문제에 대해서든지 그저 한없이 부드럽기만 하고 온유하기만 해서 싫은 소리도 안 하시고, 꾸짖지도 않으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란 분은 워낙 착한 분이시고, 천사표이실 테니까 그런 분이 다른 사람들한테 신경질을 부린다던지 화를 낸다던지, 욕을 한다던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있으니 바로 “은혜롭게 하자”는 말입니다.

“은혜롭게 하자.” 참 좋은 말입니다. 당연히 교회 안에서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풀려가야지요. 그리고 그 은혜롭다는 말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일이 풀려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너무나 좋은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에서는 모든 일이 은혜스럽게 풀려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대로, 내게 유익한 대로 풀려나가야만 은혜스럽게 풀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사람들과 회의를 하거나 대화를 나누다보면 그들은 대부분 원칙도 없고, 상식도 통하지 않게 억지를 부리면서 입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찾고, 은혜를 찾는다는 것을 많이 느끼게 됩니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지요.


그러나 사실 예수께서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한없이 부드럽기만 하고, 온유하기만 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네 복음서 어디에도 예수께서 웃으셨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지만 화를 내시고 꾸짖는 장면은 여러 군데 나옵니다. 심지어 바리새파나 사두개인들을 향해서는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욕을 퍼붓던 장면을 우리는 이미 본 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물론 예수는 어린아이나 병자들, 과부나 고아와 같이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받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없는 자비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사실은 그런 사람들은 한없이 따뜻한 웃음으로 맞이하셨고, 그들을 따뜻하게 품어주셨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들이 도움을 청할 때 예수는 단 한 번도 그것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하필이면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쳐주느냐고, 다른 날 고쳐주라고 압력이 들어와도 예수는 그것에 맞서 싸우시면서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심지어 그들이 당하는 고통을 친히 당신이 겪는 고통으로 느끼시면서 슬픔을 함께 하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웃었다는 기록은 나와 있지 않지만 눈물을 흘리시는, 아픔을 함께 나누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예수께서도 스스로 율법에 정통하다고, 율법을 다 지켰다고, 스스로 의롭다고 큰소리치는 종교인들을 행해서는 한없이 무섭게 대항하시고 싸우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따뜻한 사랑과 자비를 베푸셨고, 그 예수의 사랑이 필요 없다고 큰소리치며 교만에 빠져있던 사람들에게는 아주 무섭고 심한 야단을 치셨던 분이셨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모습, 어떻게 보면 이중적인 것 같은 예수의 모습을 보면서 가장 크게 시험에 든 사람들은 바로 예수의 가족들이었습니다. 30년을 한 집안에서 살던 가족들, 예수의 인간적인 모습을 다 지켜보았던 가족들이 예수의 공적인 활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가장 크게 혼란을 겪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의 가족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우선 예수께서 공생애 활동을 하시던 때, 예수의 가족이 누구누구였던가요? 복음서에 몇 번의 기록이 나옵니다. 우선 마가복음 6:3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 그는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이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또한 누가복음 4장에는 예수의 육신의 아버지 이름이 밝혀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서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누가복음 4:22)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께서 5병 2어의 기적을 행하신 다음에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내용의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수군거리는 모습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하고 말씀하셨으므로, 그분을 두고 수군거리면서 말하였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를 우리가 알지 않는가?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떻게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가?‘ “  (요한복음 6:41-42)


그러니까 이것들을 종합해 보면 육신으로서의 예수는 목수였던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면서 네 명의 남동생과 복수의 여동생이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물론 그중에 제일 먼저 기록되었다고 알려진 마가복음의 기록에 의해 아버지 요셉은 이미 세상을 떠난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합니다. 만일에 그때까지 요셉이 살아있었다면 마가복음 기자가 굳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라고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예수께서 공생애 활동을 하시던 당시 살아있던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자매들 특히 예수의 형제자매들은 예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받아들였을까요?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을 품고 있었을까요? 요한복음 7장에 그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의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7:5)

심지어 마가복음 3장에는 이런 기록까지 나옵니다.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어서, 예수의 일행은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었다. 예수의 가족들이,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를 붙잡으러 나섰다.”  (마가복음 3:20-21)


그렇습니다.

예수의 형제자매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까지 믿을 정도였던 것입니다. 여기 ‘미쳤다’는 단어는 희랍어로 ‘ekseste'인데 영어로 ’beside himself'이니 ‘이성을 잃다’, ‘정신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제 정신이 아니다’는 소문이 돌았고, 형제들이 예수를 데리러 간 것입니다. 물론 집으로 데려 가고자 그런 것이겠지요.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결국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나 베푸시는 기적 등이 가족들도 받아들이기 힘들만큼 대단한 것들이든지 아니면 진짜 무언가 다른 힘에 사로잡혀 그런 이상한 일을 한다고 가족들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마가복음의 내용과 같은 본문이 바로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마태복음 12:46-50까지와 누가복음 8:19-21에 나옵니다. 그리고 이 두 군데에서는 마가복음에 나오는 문제의 그 구절, 즉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서”라는 구절을 삭제함으로써 원천적으로 그런 말이 나오지 않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어쨌든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예수께서 어떤 능력으로 그런 일들을 행하시는 것인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등은 전혀 알지도 못한 채 예수를 만나러 왔습니다. 그런데 무리가 많으니까 집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바깥에 서서 예수를 만나게 해 달라고 제자들에게 부탁했던 것이지요.       

그러자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그 소식을 전했습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선생님과 말을 하겠다고 바깥에 서 있습니다.”


여러분!

누가복음에는 없는데 마가와 마태복음의 그 짧은 본문에 두 번씩이나 나오는 단어가 있으니 바로 ‘바깥에’라는 단어입니다. 안쪽이 아니라 바깥이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씀으로써 마가와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와 혈육관계라고 하더라도 예수를 믿고 따르지 않으면 바깥에, 즉 버려진 세계에 있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 선생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바깥에 서 있다고 누군가가 전해주었을 때 예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나가서 영접해야 합니다. 그게 가족으로서의 도리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께서는 아주 엉뚱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누가 나의 어머니이며, 누가 나의 형제들인가?”

무슨 말입니까? 육신적으로 나를 낳아준 어머니, 피를 나눈 형제자매라면 그것으로 충분한가? 주님께서 덧붙이셨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고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나의 어머니와 나의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


그렇습니다.

문제는 육신적으로 한 핏줄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느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면 주님의 어머니와 형제자매이지만 그렇게 살지 않으면 결단코 주님의 어머니와 형제자매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도대체 누구를 향해 이들이야말로 내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이라고 말씀하셨는가요? 여기서 다시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이 다릅니다. 마가복음 3장에 의하면 예수는 당신 주위에 둘러 앉아 있는 무리들을 내 어머니와 형제자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리가 예수의 주위에 둘러 앉아 있다가, 그에게 말하였다. . . . . .

그리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고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자매들이다.’ “  (마가복음 3:32, 34)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 오면 그 범위가 대폭 줄어듭니다.

“예수께서 아직도 무리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에, . . . . .

그리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고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나의 어머니와 나의 형제들이다.’ “


그렇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좀 더 폭넓게 예수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이고, 마태복음에 의하면 범위가 좁혀져서 제자들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두 복음서에 공통된 것이 있으니 이는 바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핵심은 제자냐 아니면 그냥 몰려든 무리에 속했느냐가 아니라 그가 진실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느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심지어는 이단들이나 추부길 같은 목사도 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고 큰소리치는데 과연 도대체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키워드가 오늘의 본문에 나와 있으니 바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는 표현입니다.


여러분!

많이 들어본 표현이지요? 그렇습니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바로 그 표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부를 때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직접 ‘내 아버지’라고 부른 것뿐입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며, 그 나라를 오게 하시며, 그 뜻이 하늘에서 이루심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십시오.” (마태복음 6:9-10)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나오는 것처럼 주님이 말씀하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은 오직 하나, 당신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형제, 자매, 어머니는 바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에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 동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만이 주님의 형제, 자매,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구절은 결코 내 마음, 내 뜻대로 살면서 입으로만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사람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사는 모습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탐욕스럽고, 제 뱃속만 채우고, 무자비한 사람들은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결코 주님의 형제, 자매, 어머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해 헌신하며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가족으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야말로 주님의 참된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늘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게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형제, 자매, 어머니가 되는,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너는 내 참된 가족이라고 칭찬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