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6. 1 / 더 큰 이 / 마태복음 12:38-42
더 큰 이/2008.6.1.
본문) 마태복음 12:38-42
“그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에게서 표징을 보았으면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예언자 요나의 표징 밖에는, 이 세대는 아무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땅 속에 있을 것이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를 정죄할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선포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아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를 정죄할 것이다. 그는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부터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아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 (표준새번역 개정판)
그 옛날 유대 땅에서 지혜의 왕 솔로몬이 죽고 나라가 남과 북, 둘로 갈라지던 무렵 유대의 저 먼 동쪽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한 나라가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으니 이름하여 앗시리아입니다. 기원전 880년 디글랏빌레셀 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앗시리아는 급격히 세력을 떨쳐 당시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통일하고, 주변을 정복해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정복지가 바로 유대가 있던 팔레스타인 지방이었으니 그곳에 있던 나라와 민족들이 불안에 떤 것은 당연했습니다.
이후 100여 년 이상 앗시리아는 끊임없이 팔레스타인 지방으로 쳐들어와서 사람들을 죽이고, 포로로 잡아가고, 재물을 약탈하고, 조공을 받아갔습니다. 물론 앗시리아도 약해질 때가 있었지만 마침내 기원전 726년 살만에셀 5세가 등장했는데 이 사람은 아버지 디글랏빌레셀 3세와 함께 위대한 정복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사마리아 성을 공격하여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상류계급 27,290명을 포로로 잡아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의 많은 민족을 끌고 들어와 남아 있던 유대인들과 혼혈이 되게 함으로써 유대인들에게 크나큰 아픔과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유대의 열 두 지파 중에서 열 지파가 사라지게 된 것이 바로 살만에셀 5세 때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다행히 살만에셀 5세는 남왕국 유다는 남겨놓고 가는 바람에 그들이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언제 또다시 쳐들어와서 자기네들을 없애버릴 지 모르는 무시무시한 시대였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앗시리아인들은 어떤 존재입니까? 한 마디로 원수입니다. 그것도 그냥 원수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앗시리아를 향해 무서운 심판의 말을 선포해야 했습니다. 실제로 바로 그러한 예언자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나훔입니다. 나훔의 책은 3장밖에 되지 않는 짧은 책이지만 그 전체가 앗시리아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는 내용들입니다. 나훔서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것은 엘고스 사람 나훔이, 니느웨가 형벌을 받을 것을 내다보고 쓴 묵시록이다.”
니느웨, 이는 곧 앗시리아의 수도 이름이니 나훔은 앗시리아가 받을 형벌에 대해 선포한 예언자입니다. 그는 앗시리아를 향해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너는 망한다! 피의 도성!
거짓말과 강포가 가득하며
노략질을 그치지 않는 도성!
찢어지는 듯한 말채찍 소리,
요란하게 울리는 병거 바퀴 소리,
말이 달려온다.
기병대가 습격하여 온다.
칼에 불이 난다.
창은 번개처럼 번쩍인다.
떼죽음, 높이 쌓인 시체 더미,
셀 수도 없는 시체,
사람이 시체 더미에 걸려서 넘어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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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시리아의 왕아,
네 목자들이 다 죽고
네 귀족들이 영영 잠들었구나.
네 백성이
이 산 저 산으로 흩어졌으나,
다시 모을 사람이 없구나.“ (나훔서 3:1-3, 18)
이것이 앗시리아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예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예언이 이루어져서 결국 앗시리아는 나중에 바빌론에게 멸망당하고 맙니다.
그런데 여러분!
앗시리아를 그렇게도 철천지원수로 생각하던 유대인들인데 하나님께서 그중 한 사람에게 참으로 놀라운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 명령은 아주 짧지만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명령을 들은 사람이 바로 요나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읍에 대고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내 앞에까지 이르렀다.’ ” (요나서 1:1-2)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악이 너무 심해서 멸망당할 수 밖에 없게 되었으니 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설교하라는 것입니다.
아니 여러분,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니느웨 사람들은 진짜 나쁜 사람들이어서 멸망당해야 하는데 어찌 그곳에 가서 구원받으라고 선포하란 말입니까? 당연히 요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요나도 유대인이니까, 그리고 니느웨 사람들은 멸망 받아 없어져야 할 사람들이니까 그렇게 말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도망갔습니다. 배를 타고 아시스를 향해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큰 물고기 뱃속에 넣으셨다가 구해 주신 후에 다시 명령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또다시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이제 내가 너에게 한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 (요나서 3:1-2)
요나는 어쩔 수 없이, 전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지만 할 수 없이 니느웨로 갔습니다. 니느웨로 가 보니까 니느웨 성은 대제국 앗시리아의 수도답게 둘러보는 데만 사흘이 걸릴 정도로 큰 성읍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구석구석 찾아가서 말씀을 전하려면 여러 날 걸릴 도시였습니다. 그 도시에 사는 사람의 숫자가 무려 12만 명이나 된다고 요나서 4장 1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가서 전하기는 했지만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가서 전한 것이 아니고 억지로 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요나서 3장 4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나는 그 성읍으로 가서 하룻길을 걸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
그러니까 사흘 길을 걸어야 다 갈 수 있는 그 도시를 다 다닌 것이 아니고 하루, 아마도 낮 동안에 잠깐 다녔을 것입니다. 큰소리로 외쳤다고 되어 있기는 하지만 거기에 힘이 실려 있기나 했겠습니까? 그냥 아무렇게나 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그 요나의 설교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다 알고 있습니다. 요나서 3장 10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뉘우치는 것, 곧 그들이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여러분,
요나서 4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요나가 화가 났던 것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4장 1절 이하에 참으로 재미있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나는 이 일이 매우 못마땅하여, 화가 났다. 그는 주님께 기도하여 아뢰었다.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서둘러 스페인으로 달아났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임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제는 제발 내 목숨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 (요나서 4:1-3)
그리고는 5절에서 이렇게까지 행동합니다.
“요나는 그 성읍에서 빠져 나와 그 성읍 동쪽으로 가서 머물렀다. 그는 거기에다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았다. 그 성읍이 어찌 되는가를 볼 속셈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을 멸망시킬 것을 간절히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끝내 니느웨를 심판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물론 대부분의 학자들은 요나의 이야기를 실제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학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니느웨 사람들은 심판받아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꼭 그래야 되는가? 악하다고 해서 꼭 심판받아야 하는가? 그들도 회개하고 구원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이방인들도 구원받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요나서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에게서 표징을 보았으면 합니다.”
표징, 희랍어로 ‘semeion'이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바 ’사인‘(sign) 즉 무언가 의미가 있는 표지를 말합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무언가 사인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다음과 같이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당신이 성령에 힘입어서 일한다면 그것을 증명할 만한 사인으로서의 기적을 보여주시오.”
그런데 사실 예수께서는 이미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사인이 될 만한 기적들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그것을 보고도 믿지 않았으면서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기적을 보여 달라는 것이지요. 물론 그런다고 해서 믿을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기적을 보고 믿을 사람들이라면 이미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고 믿었겠지요. 그래서 예수께서 3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예언자 요나의 표징 밖에는, 이 세대는 아무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의 표징 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요? 그렇다면 요나의 표징이 무엇입니까? 40절에 나와 있습니다.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땅 속에 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실 표징은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발 표징 따위를 요구하지 말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표징이라는 단어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면 잘 풀리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40절과 41절이 잘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선 39절과 40절은 잘 연결됩니다. 요나의 표징 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는데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있었던 것 같이 인자는 죽고 무덤에 들어갔다가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큰 물고기는 무덤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보면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분명히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 사흘 낮, 사흘 밤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 40절에 보면 “인자도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땅 속에 있을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땅 속에 있었던 시간은 넉넉하게 잡아도 이틀 낮, 이틀 밤입니다. 금요일 오후 3시에 돌아가셔서 무덤에 들어가셨다가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으니까 계산해 보면 아무리 길게 잡아도 이틀 낮, 이틀 밤입니다. 그러니까 숫자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설혹 그 문제를 그냥 넘긴다고 해도 40절에서 땅 속에 있었던 이야기가 나오고 바로 이어서 나오는 41절에서는 전혀 엉뚱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를 정죄할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선포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아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여러분!
니느웨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회개했습니까?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사흘 만에 나온 것을 보고 회개했습니까? 분명히 요나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냥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멸망한다”는 이야기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본문에서 41절에 초점을 맞춘다면 여기의 핵심은 “회개”입니다. 그렇게도 죄가 많던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가 단 하루, 그것도 성의없이 설렁설렁 설교를 한 것을 듣고도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많은 예언자들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유대인들의 후손인 그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특히 바리새파나 사두개파 사람들은 예수께서 그렇게도 많은 설교를 행하셨고, 그렇게도 많은 기적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비방하고 시험하고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애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40절과 41절의 말씀은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38절부터 42절의 말씀은 앞에도 회개에 대한 말씀이 나오고 뒤에도 잘못 회개하면 더 큰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본문도 결국 하고 싶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쓸데없이 표징이나 구하지 말고 회개하라.”
그렇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의 경험에 만족하지 않고 사랑의 표징을 요구한다면 그 순간 그것은 사랑의 종말을 나타내는 것이듯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께 표징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곧 신앙의 종말을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보증이 요구되는 곳에는 더 이상 신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요나는 분명히 니느웨 사람들에게 자기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니느웨 사람들은 당연히 그런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요나는 단순히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고 외쳤을 뿐입니다. 그들이 듣든지 말든지, 아니 사실은 그들이 듣고 회개하면 큰일이라고 생각하고 어쩔 수 없이 외쳤을 뿐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니느웨 사람들은 설교를 듣고 회개했습니다. 그러므로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징이 되었던 것은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왔다는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징이 되었던 것은 오직 회개하라고 외친 요나의 설교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대를 위하여 예수께서 보여주실 표징은 눈에 보이는 기적들이 아니라 회개하라고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또한 회개하라고 외치던 요나라는 자의 존재 자체가 표징이었듯이 회개하라고 선포하시는 예수라는 분 자체가 표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주님은 또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보아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가 계신 것만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것 말고 오직 예수께서 선포하신 말씀만을 듣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을 보았기 때문에 회개한 것이 아니라 요나라는 사람 자체를 보고, 또 그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 헸던 것처럼 이제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도 어떤 기적을 보고 회개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 보고 또 예수께서 전하셨던 말씀만을 듣고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많은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은 채 새삼스럽게 다시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곧 그들의 철저한 불신앙을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서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가 요나나 솔로몬보다 더 큰 이, 아니 정확히 말하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또 받아들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심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어떻습니까? 예수 이외의 다른 것, 예수의 말씀 이외의 다른 기적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방언을 해야 믿음이 좋은 것이다, 기적을 행해야 믿음이 좋은 것이다, 심지어는 경제적인 축복을 받아야 믿음이 좋은 것이라고 가르치고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씀만 듣는 것으로는 안 된다고 하며 끊임없이 다른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예수님 당시 끊임없이 표징을 요구하던 사람들과 똑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기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이 선포하신 말씀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만이면 충분합니다. 예수만으로 만족하고, 성경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른 징표는 필요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예수와 그의 말씀만으로 만족하고 그가 계신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인 것, 주님께서 내 곁에 계시다는 것을 내가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이곳이 하나님의 나라임을 믿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