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7. 15 / 우리를 구하소서 / 마태복음 6:13-15
우리를 구하소서
마태복음 6장 13-15절/2007. 7. 15
주기도문은 그 분량으로 보면 아주 짤막한 기도문이지만 그 내용을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주기도문의 후반부에 해당되는 11절부터 13절까지에서 주님은 인간이 세상에서 겪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을 짚어주고 계십니다. 첫 번째로 누구나 벗어날 수 없는 문제 즉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간구했고, 이어서 인간은 누구나 죄인임을 고백하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사고 간구하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는데, 도대체 죄는 무엇입니까? 도대체 인간이 지은 죄가 무엇이고, 얼마나 죄가 많기에 끊임없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사고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까?
창세기 2:4b-3:25에 나오는 두 번째 창조 이야기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요즘 월요성서 연구시간에 구약을 하고 있고, 그중에서 창세기를 하고 있는데 그때도 말씀드렸다시피 두 번째 창조 이야기는 사실은 창조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즉 2장이 중심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 이야기, 그러니까 3장이 중심인 이야기로 보아야 합니다.
제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그들로부터 창조 이야기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그들은 제게 말합니다. “잘 모르기 때문에 궁금해서 물어보면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대답을 하지 않고 회피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묻는 질문 가운데 아담과 하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으니까 세상에는 두 사람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이 아들 둘을 낳았는데 가인과 아벨이다. 그러니까 인구가 총 4명이 되었다. 그런데 그만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 그럼 3명 남았다. 그런데 가인이 뭐라고 말하는가?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그를 죽이려고 하는 것인가? 아담이나 하와인가? 물론 아니다. 그리고 가인이 여자를 만나 결혼하여 아기를 낳았는데 그 여자는 어디서 나왔는가? 아담이 다시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이 셋이었다. 그도 결혼하였는데 그러면 셋의 부인은 어디서 나타났는가?”
이렇게 물으면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대답하지 않고 그냥 넘어간다는 것이지요. 무조건 믿으라고만 말한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는 아담이 첫 번째 인간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 창조이야기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 이야기는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도입부로 한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가? 이것은 ‘인간은 누구냐?’,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 싶은 것이고, 그 대답은 바로 “인간은 죄인이다”라는 진리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로봇이나 기계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만드셨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2:15-17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주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곳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 주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셨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 ”
이것은 한 마디로 인간에게 자유가 주어졌지만 그 자유는 문자 그대로 절대적인 자유가 아니라 제한된 자유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피조물이기 때문에 주어진 한계입니다. 그런데 그만 처음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거역했다는 것을 통해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존재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이라는 단어는 첫 번째 인간을 타나내는 고유명사로 보기보다는 ‘사람’이라고 하는 일반명사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아담의 이야기는 옛날 첫 번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창세기 저자의 이야기이고, 동시에 그것을 읽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따라서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던 것이 죄였습니다. 그래서 뱀이 여자를 유혹하면서 했던 말, 바로 “네가 이것을 먹으면 하나님처럼 되리라”였습니다. 그래서 죄는 궁극적으로 언제나 하나님께 반항하는 폭력적인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교만한 태도이며 주제넘음의 극치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악이요, 역사적 죄이자 자유의 남용의 결과입니다. 이 죄는 모든 인간 사회들 속에서 점차 축적되어 “세계의 죄”를 이룹니다. 죄는 인격과 삶의 양식 속에 내면화되어 인간의 심연 깊은 곳에 고착되어 버리고, 결국은 인간의 제2의 본성처럼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결국은 구조적인 악으로 자리잡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죄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그 책임을 누군가에게 떠넘기는데 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이 첫 번째로 보이는 반응, 그것은 바로 “내 잘못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나는 안 그러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라고 말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도 남자는 하나님과 여자에게 자기가 지은 죄의 책임을 떠넘겼습니다.
“그 남자는 핑계를 대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그것을 먹었습니다.’ ” (창세기 3장 12절)
여자에게 책임을 넘길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그 책임을 넘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 그 여자가”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물으셨을 때 여자는 뱀에게 책임을 떠넘겼습니다.
“주 하나님이 그 여자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쩌다가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여자도 핑계를 대었다. ‘뱀이 저를 꾀어서 먹었습니다.’ ” (창세기 3장 13절)
그렇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죄의 유혹을 받는 존재이고, 또 끊임없이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그렇게도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정확히 아셨기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십시오.“
그런 점에서 이 기도는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기도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시험은 단순히 금지된 것에 대한 끌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 이야기는 그것을 따먹었다, 아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소위 이단이라고 불리는 종파들이 그 단어에 지나치게 사로잡혀서 그 단어를 해석하려다 보니까 그것을 피가름이라는 교리 따위로 해석하다가 잘못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사실은 선악과라는 단어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성서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이 끊임없이 겪게 되는 시험은 인간이 결국 하나님을 반대하는 힘들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고 내가 하나님처럼 되어보려고 하고,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는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원초적으로 그 시험에 너무나 약하다는 것을 창세기 저자는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바로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최후의 기도를 하실 때 제자들에게 하셨던 바로 그 말씀입니다.
“이렇게 너희는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느냐?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여라.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마태복음 26장 40-41절)
여러분!
우선 우리가 주기도문의 이 기도를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셨다”라는 의미를 거부해야 합니다. 분명히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시험에 들어가지 않게 지켜 주소서”라는 의미이고, 그래서 바로 이어서 “악에서 구하여 주십시오”라고 가르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본문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우리의 신앙이 살아남지 못하는 시험을 피하게 해달라고 지극한 겸손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너무나 연약하기에 결국 시험을 당할 것이지만 그 시험을 당할 때 그 시험 중에 유혹으로 돌이킬 수 없게 깊이 들어가지 않도록, 즉 유혹에 말려 신앙을 저버리는 일에 빠져 들어가지 않게 하소서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까? 왜 주님께서 이 기도를 하라고 명령하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주님이신 예수께서 일생동안 일관되게 사탄 즉 유혹과 악의 화신인 사탄과 대결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사탄을 하나하나 정확히 물리치셨으며, 모든 피조세계를 사탄으로부터 해방시키셨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셨던 맨 처음부터 사탄과 대결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기 위하여 사람들 앞에 나타난 이후 즉시 적의 진영- 사막 -으로 인도되었으며 그곳에서 사탄에게 시험받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사십 일 동안 광야에 계셨는데, 거기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마가복음 1장 13절)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을 이기셨고, 사탄은, 악마는 떠나갔습니다.
“이 때에 악마는 떠나가고, 천사들이 와서, 예수께 시중을 들었다.”
(마태복음 4장 11절)
그러나 사탄은 단지 잠시 활동을 중지한 것이었으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악마는 모든 시험을 다 한 뒤에, 잠시 동안 예수에게서 떠나갔다.” (누가복음 4장 13절)
그래서 예수가 공생애를 지내시는 동안 예수는 끊임없이 사탄 또는 그의 하수인인 귀신들을 만나셔서 그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는 사탄에게 여유를 주지 않았으며, 그를 만나기만 하면 언제나 그가 병자들 속에 들어가 있든지 바리새인들의 완고한 마음속에 들어가 있든지 간에 추방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을 비롯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를 영접하지 않고 교만과 위선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그들이 사탄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그들을 향해서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말씀을 좀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녀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는, 너희에게 하나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말해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이런 일을 하지 않았다.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우리는 음행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며, 우리에게는 하나님이신 아버지만 한 분 계십니다.’ ”
(요한복음 8장 39-41절)
은근히 예수의 출신성분을 문제 삼고 있는 것입니다. 비꼬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너희의 아버지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에게서 와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내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어찌하여 너희는 내가 말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그것은 너희가 내 말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으며, 또 그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다. 또 그는 진리 편에 있지 않다. 그것은 그 속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말을 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는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너희는 나를 믿지 않는다.”
(요한복음 8장 42-45절)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예수를 배척하게 했던 사탄은 밀밭에 가라지를 뿌리고, 가룟 유다의 마음에 들어앉은 원수였습니다.
“사탄이 열둘 가운데 하나인 가룟이라는 유다에게로 들어갔다.” (누가복음 22장 3절)
“저녁을 먹을 때에, 악마가 이미 시몬 가룟의 아들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를 팔아넘길 생각을 불어 넣었다.” (요한복음 13장 2절)
또한 사탄은 시몬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을 밀 까부르듯이 까부르려고 시도하였으며(누가복음 22장 31절), 예수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시련을 받는 동안 그와 함께 견디어 온 것을 고마워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시련을 겪는 동안에 나와 함께 한 사람들이다. 내 아버지께서 내게 왕권을 주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에게 왕권을 준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나라에 들어와 내 밥상에서 먹고 마시게 하고, 옥좌에 앉아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심판하게 하겠다.”
(누가복음 22장 28-30절)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뇌에 차 있는 동안 사탄의 공격이 감행되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경고하셨고, 사탄은 온 힘을 모아 예수를 십자가에 달게 만들었고, 십자가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사탄은 예수를 거의 절망상태로 몰고 갔으니 예수께서는 처절하게 울부짖으셨습니다.
“세 시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부르짖으셨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그것은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뜻이다.”
(마가복음 15장 34절)
그래서 사탄이 이긴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사탄이 승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의 영을 악마가 아닌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심으로써 궁극적으로 사탄을 패배시키셨습니다.
“예수께서 큰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셨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는 숨을 거두셨다.” (누가복음 23장 46절)
그렇습니다.
시험은 예수의 삶에 있어서 순간적으로 일어난 어떤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전 생애를 통해 그를 따라다닌 어두운 그림자였습니다. 악마는 결코 게으르게 빈둥거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자신의 죄악을 퍼뜨리고 다닙니다. 악마는 부지런히 자기의 하수인들을 만들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들고 이 땅에 사탄의 나라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예수께서 온 몸으로 악마와 싸워 이기셨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악마의 나라에 대립하여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위대함은 시험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시험을 극복한 그의 능력 속에서 발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시험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 아니라 시험을 당하셨지만 말씀으로 끝내 시험을 이기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를 시험하는,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예수를 부인하게 만드는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드는 세력이 있으니 그것을 주님은 “악”이라 불렀고, 따라서 우리는 “악에서 구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악을 이야기하면, 사탄을 이야기하면 기독교인들은 두 가지 반응을 나타냅니다. 하나는 그거 다 이천년 전 이야기라고, 요즘 같이 개명천지한 세상에 사탄이 어디 있느냐, 사탄은 없고 옛날이야기라고 무시하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요즘도 모든 것을 다 귀신이 역사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감기걸린 것도 귀신 때문이고, 집안에 자식이 대학시험에 떨어지는 것도 귀신 탓이고, 길을 가다 넘어지는 것도 귀신이 한 짓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러한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는 위험합니다. 귀신은 없다, 악은 없다는 주장도 위험하고 또 귀신이 모든 것을 주장하기 때문에 내가 겪는 모든 일을 귀신 탓으로 돌려버리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분명히 악은 있습니다. 사탄의 세력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악이, 귀신이 이 천년 전 사람들에게 나타났던 방식으로만 나타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물론 요즘도 그렇게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귀신이 인간을 사로잡아서 괴롭히고, 고통에 빠뜨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그런데 사탄은 그것보다 훨씬 더 교활하고 간교하게 인간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단순히 한 개인을 사탄이 사로잡아서 못되게 하는 정도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보다 훨씬 더 간교하고 교묘하게 자기의 세력을 넓혀가려고 하는데 훨씬 더 아름답게 치장하고 훨씬 더 그럴 듯하게 치장하고 사탄은 나타납니다.
오늘날 특히 기독교인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해서 거짓된 복음을 가지고 교인들에게 접근하는 세력들은 사탄의 무리들입니다. 성경말씀을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하고 복음과 전혀 관계없이 해석하면서 사람들을 진리의 길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그럴듯한 사람들 모두 사탄의 자식들입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그것을 통해 돈을 벌고, 인간적인 명예를 누리고 하나님 대신 자기네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간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자들은 다 사탄의 무리들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빙자해서 돈 모으고 권력잡고, 그 돈으로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쌓아놓고 끊임없이 부동산투기하면서 엄청난 건물이나 짓는 일들은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사탄은 끊임없이 인간들에게 재물에 온 마음을 쏟게 하고 지나친 근심걱정에 사로잡혀 살게 하고, 세상에는 나만 있는 것처럼 살게 하고, 믿는 사람들이나 세상 사람들 앞에서 과장되게 자기들의 경건함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시청 앞 광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박사가운 입고 나가고 설교도 하고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마는, 그렇게 해서 겉으로는 경건한 것 같지만 사실은 세상을 병들게 하고 그 마음속에 참 사랑이 없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겠다는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사탄의 현대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사탄은 바로 그런 존재들을 통해 자기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악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세상 속에서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십시오.“
여러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오늘날 성령 안에서 역사한다는 지도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영들 가운데 악령이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너무나 크게 악령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빙자한 악령들과의 싸움을 해야 합니다. 악령은 교인들로 하여금 신앙생활을 쉽게 쉽게 하라고, 예수 믿으면 다 잘 살게 되어 있다고, 예수 믿으면서 가난하고 병들면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건물을 크게 지으라고, 기적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라고, 성령의 이름으로 권력자의 앞잡이가 되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탄이 예수를 시험하려고 요구했던 세 가지에 다 들어있는 것들입니다. 그것은 악령들이 한국교회를 향해서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또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지켜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우리를 악에서 구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면서 주님의 보호하심을 믿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주기도문의 후렴부를 할 수 있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바로 우리가 앞에 있는 세 가지 간구를 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아버지께 돌리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후렴부는 그렇게 살겠다고 다짐하는 우리의 다짐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다짐을 하며 살아갈 때 주님께서는 아멘 하며 우리를 받아주실 것입니다. 이 믿음 가지고 끝내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