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4. 22 / 맹세에 대한 교훈 / 마태복음 5:33-37
맹세에 대한 교훈
마태복음 5장 33-37절/2007. 4. 22
제가 목요일 저녁에 보통 설교 원고를 쓰는데 지난 목요일 저녁에 제 옆에 있던 아내가 한 마디 하더군요. 마태복음 강해를 시작하더니 매주 논문을 한 편씩 쓰고 있다고요. 저는 그 말이 칭찬인지 아닌지 헷갈렸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칭찬같지는 않고 아무래도 요즘 설교가 너무 딱딱하고 어렵다는 뜻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사실 오 집사님 같은 전형적인 사고형들은 들을 만 할 것이지만 저같은 전형적인 감정형들은 솔직히 마태복음 가지고 설교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사 복음서 중 누가, 마가, 요한복음을 이미 다 했으니 어쩔 수 없지요. 마태복음 자체가 워낙 논리적이고 논쟁적인 책이기에 요즘 저같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능한 한 쉽게 하려고 애쓰고 있으니까 잘 소화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여러 군데에서 맹세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는바, 그 가르침들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지향적이고 단정짓는 맹세요, 다른 하나는 미래지향적이고 서약을 하는 맹세입니다. 무슨 말인가?
과거지향적이고 단정짓는 맹세는 ‘내가 전에 이런 일을 했다’ 또는 ‘나는 하지 않았다’고 단언하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기 말을 믿도록 하려고 하나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맹세입니다. “내가 전에 이렇게 했었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해”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에 대하여 레위기 19장 12절에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하여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나는 주다.”
그러니까 거짓말을 하면서 그것을 감추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기에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앞으로 하나님께 짐승이나 집 또는 토지 등을 바치겠다고 맹세하거나 무슨 선행을 하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하는 맹세가 있으니 이것이 곧 미래지향적이고 서약을 하는 맹세입니다. 율법은 여기에 대해서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신명기 2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 너희의 하나님께 맹세하여서 서원한 것은 미루지 말고 지켜야 한다. 주 너희의 하나님은 반드시 그것을 너희에게 요구하실 것이니, 미루는 것은 너희에게 죄가 된다. 맹세하지 않은 것은 너희에게 죄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 번 너희의 입으로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너희가 주 너희의 하나님께 입으로 약속한 것은 서원한 대로 하여야 한다.”
(신명기 23장 21-23절)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맹세하지 않았으면 모르지만 맹세해 놓고 지키지 않은 채 미루면 그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입으로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에게 가져올 참 제사는
감사하는 마음이요,
너희가 ‘가장 높으신 분’에게 가져올
참 서원제는
너희가 맹세한 것을 지키는 바로 그것이다.“ (시편 50편 14절)
여러분!
율법에 나오는 바, 맹세에 대한 이 두 가지 가르침은 참으로 합당한 가르침으로 보여 집니다.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서는 참말이라고 강변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거나 하나님의 이름까지 팔아가면서 맹세를 하고도 지키지 않는다든지, 또는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하고 맹세를 해 놓고도 제 마음대로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히 죄요, 따라서 벌을 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사람이 사람과 맺은 약속도 지키는 것이 마땅한 일이요, 인간의 도리일진대 더구나 하나님과 맹세한 것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찌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그러니까 율법에서 거짓 맹세를 하지 말고, 또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여기까지만 보면 맹세에 대한 가르침은 다 살펴본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옛사람에게 이르기를 ‘너는 거짓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하고, 네가 맹세한 것을 그대로 주께 지켜야 한다’ 한 것을 너희가 또한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말아라.”
여러분!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거짓 맹세는 물론이요, 좋은 의미에서의 맹세도 아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조목조목 예를 들어가면서까지 결단코 그 어떤 맹세라도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발을 놓으시는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 그것은 크신 하나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 너는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선 예수께서는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입니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땅은 하나님께서 발을 놓으시는 발판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큰 임금의 도성 곧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있는 도성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이 세 가지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은 물론이요, 하나님과 관계되는 그 어떤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네 번째 것은 조금 엉뚱해 보입니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 예수께서는 스스로 그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너는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기 머리에 있는 머리카락 하나라도 그 색깔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니 머리를 다스리는 분도 결국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머리를 두고 맹세하는 것 역시 결국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 되니까 아예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도대체 왜 예수께서는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율법을 완전히 부정하는 말씀을 하셨는가요?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특히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이 그리고 심지어는 사도 바울까지도 얼마나 자주, 그리고 즐겨 맹세를 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마태복음 23장 16절 이하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눈 먼 인도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말하기를 ‘누구든지 성전을 두고 맹세하면 아무래도 좋으나, 누구든지 성전의 금을 두고 맹세하면 지켜야 한다’고 한다. 어리석고 눈 먼 자들아! 어느 것이 더 중하냐?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또 너희는 말하기를 ‘누구든지 제단을 두고 맹세하면 아무래도 좋으나, 누구든지 그 제단 위에 놓여있는 제물을 두고 맹세하면 지켜야 한다’고 한다. 눈 먼 자들아! 어느 것이 더 중하냐? 제물이냐? 그 제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요,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성전과 그 안에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 또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보좌와 그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23장 16-2절)
그렇습니다.
당시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성전이나 제단을 두고 맹세하면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성전의 금이나 제단 위의 제물을 두고 맹세하면 지켜야 한다는 말도 되지 않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맹세가 얼마나 잘못된 것이며, 또 편의적으로 하는 것인지를 예수께서는 지적하고 계십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새파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바리새파 출신인 사도 바울도 거의 습관적으로 맹세를 반복했습니다.
“꼭 자랑을 해야 하면, 나는 내 약점을 자랑하겠습니다. 영원히 찬양을 받으실 주 예수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아십니다.” (고린도후서 11장 30-31절)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심정으로 여러분 모두를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는, 하나님께서 증언해 주십니다.” (빌립보서 1장 8절)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이 말은,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거짓말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1장 20절)
“여러분이 아는 대로, 우리는 어느 때든지 아첨하는 밀을 한 일이 없고, 구실을 꾸며서 탐욕을 부린 일도 없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증언하여 주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5절)
“또 신도 여러분을 대할 때에, 우리가 얼마나 경건하고 올바르고 흠 잡힐 데가 없이 처신하였는지는, 여러분이 증언하고, 또 하나님께서도 증언하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0절)
여러분!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제켜 놓더라도 사도 바울이 한 이 말들은 틀림없이 진실한 말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어찌 거짓을 말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말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내 말의 증인이시라고, 하나님 앞에서 이 말이 진실임을 맹세할 수 있다고 말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이 그렇게 말한 이유는 바로, 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성전의 금을 두고 맹세하고 심지어는 제단 위에 있는 제물을 두고까지 맹세한 것은 실은 그들이 사람들을 믿을 수없는 존재로 간주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을 포함해서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인간들은 그들 존재 자체를 믿을 수 없고, 따라서 그들 외부의 힘에 호소하지 않고서는 결코 믿을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엄청난 불신이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믿지 못하고, 내가 너를 믿지 못하니까 너도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말을 믿지 못하니까 하나님께 걸고 맹세하고, 성전의 금덩이나 제단 위의 제물에 걸고 맹세할 테니 제발 내 말을 믿어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맹세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에 대한 철저한 불신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 그 자체를 믿을 수 있다면 맹세가 필요없는 것입니다. 말 한 마디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것을 보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이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고, 서로 믿는 것처럼 보였지만 서로가 믿지 못했기에 자꾸 하나님을 끌어들이고 성전의 금, 제단의 제물을 끌어들여서 나를 믿어달라고 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상황 속에서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맹세하지 못하게 하시면서 두 가지 이유를 드신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서요, 다른 하나는 인간의 존엄성을 보존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분별없이 사소한 일들에 하나님을 결부시켜서는 안 되며, 동시에 사람을 누구나 거짓말하게 되어 있는 어쩔 수 없는 존재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말 한 마디하면 그것으로 믿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단순성과 솔직함, 그리고 성실성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모두가 한 가족이며, 따라서 맹세가 필요없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자신도 당신 말씀을 강조하기 위해서 맹세를 이용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예수께서는 으레 ‘아멘, 아멘’ 하고 말씀하셨으니 번역하면 ‘진실로, 진실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께서는 그 말씀 끝에 이런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여러분!
너무나 당연한 말씀 아닙니까?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오늘날까지 대부분의 한국교인들이 보고 있는 개역성경에서는 37절이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저는 여기서 저의 신학교 학부 졸업논문 지도교수였고, 지금은 대한성서공회 총무로 계신 민영진 박사님의 해석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민 박사님의 글에 의하면 많은 목사님들이 이 본문을 해석할 때 몇 가지로 오해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무엇인가를 긍정할 때는 꼭 옳다는 사실을 두 번 반복하여 ‘옳다, 옳다’ 하고 말하고, 무엇인가를 부정할 때도 역시 아니라는 것을 두 번 반복하여 ‘아니라, 아니라’ 하고 말하라는 뜻으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고 말하였으니, 이것은 ‘옳다’는 말이나 ‘아니라’는 말은 꼭 두 번만 말하고 세 번이나 그 이상은 하지 말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오해는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옳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하라. 그 이외의 것은 악을 행하는 것이다’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옳으면 옳다 하고 그르면 그르다고 해야지, 잘 모르겠다는 식으로 모호한 입장을 취하거나 양비론이나 양시론을 말하는 것은 다 악을 행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37절을 흑백논리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이지요.
세 번째 오해는, 37절을 매사에 사람이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하는 것을 가르치는 교훈이락 생각하는 것입니다. 의사 결정에 참여할 것을 요청받는 경우, 기권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이면 가, 부이면 부의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기권과 같은 행위가 곧 ‘이에서 지나는 것’에 속하는 것이고, 이는 악이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 오해는, 거짓말하는 것을 경고하는 말이라고 37절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속으로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옳다고 하거나, 반대로 속으로는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니라고 하는 것을 경고하는 말씀이라고 해석하는 경우이지요. 곧 ‘예’와 ‘아니오’를 올바른 의미로 쓰지 않고, 반대 의미로 쓰는 것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나는가요? 그것은 바로 다 본문을 떼어놓고 해석한 결과들입니다. 즉 37절 말씀을 앞의 본문과 떼어놓고 독립된 구절로 보았기 때문에 그런 해석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37절 말씀은 반드시 앞 구절들과 관련지어 해석해야 한다고 민 박사님은 강조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살다 보면, ‘예’나 ‘아니오’를 말해야 하는 경우가 분명히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그러한 경우에 사람이 ‘예’나 ‘아니오’를 말하되, 거기에 맹세하는 말을 덧붙여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은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신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고,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고,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고, 각자의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의 결론이 바로 37절입니다. 즉 ‘예’라고 긍정해야 할 때에는 다만 ‘예’라고만 하면 충분하고, 아닐 경우에는 다만 ‘아니오’라고만 말하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예, 그렇고말고요. 만일 아니라면 내 목이라도 내 놓겠소”라고 말한다든지, “아닙니다. 만약 내 말이 틀리다면 내가 성을 갈아요” 하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유대인 식으로 표현한다면 “예, 살아계신 하나님을 두고 맹세합니다. 맹세코 그렇습니다” 하고 말한다든가, “아닙니다. 예루살렘을 두고 맹세합니다. 절대로 그게 아닙니다” 라고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동생 야고보 장로는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하늘이나 땅이나, 그 밖에 무엇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예’ 해야 할 경우에는 오직 ‘예’라고만 하고, ‘아니오’ 해야 할 경우에는 오직 ‘아니오’라고만 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은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야고보서 5장 12절)
그래야 심판을 받지 않는다고요?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여기 나오는 ‘악에서’라는 단어는 ‘사탄에게서’라는 뜻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면 충분한데 거기에 맹세 따위 군말을 덧붙이는 것은 사탄의 사주를 받은 짓거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을 빈정거리는 말이나 잘못 해석될 말, 상처를 주는 모호한 표현들을 피해야 하는데, 이런 것들은 다 거짓말의 아버지인 사탄에게서 나오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보존하고 서로가 서로를 맹세하지 않고 말 한 마디만 하면 믿을 수 있는 존재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그 무엇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로만 온갖 술수를 부리고, 걸핏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끌어들여 자기의 거짓을 그럴 듯하게 꾸미려 하고, 지극히 작은 일에까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그렇게 살지는 못함으로써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비록 몸은 교회에 와 있을지라도 오히려 사탄의 종이요, 지옥의 자식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야말로 전혀 맹세가 필요하지 않은, 단순한 마음과 솔직한 말, 그리고 성실한 행동으로 서로를 믿고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공동체로 성장해 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