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4. 8 / 간음에 대한 가르침 / 마태복음 5:27-30
간음에 대한 가르침
마태복음 5:27-30/2007.4.8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시내에 있던 어느 교회에 전도사로 처음 간 것이 1982년 3월입니다. 가자마자 담임목사님께서 설교를 하라고 해서 곧바로 주일예배 때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첫 주에 설교하러 강단에 올라갔더니 담임목사님께서 바로 턱 밑에 앉아 계시더군요. 얼마나 떨리든지요. 그렇게 두 세 주 제 설교를 들으시더니 그 다음부터는 뒷자리에 가서 앉으셨고, 얼마 지나서는 참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설교 잘 한다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하시는 말씀, ‘나 같으면 이 전도사가 하는 설교 내용으로 세 편은 하겠다.’ 그러니까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고 느끼신 것이지요. 그 후 저는 설교 한 편에서 한 가지 이야기만 하려고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제가 20년이 넘도록 목회를 했고, 또 그 기간만큼 설교를 했으니까 부활절 설교를 스무 번도 넘게 해 온 셈인데 아마 부활절에 하는 설교 제목이 오늘과 같은 경우는 저도 처음이고, 또 다른 목사님들 중에서 그 누구도 이런 제목으로 부활절 설교를 하신 분들이 없을 것입니다. 아마 제 설교를 받아보시는 분들이 의아하게 생각하시리라 짐작합니다. 제가 목회서신에서도 밝힌 것처럼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부활절 날짜를 착각하는 바람에 이렇게 엉뚱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오늘이 제 생각대로 하면 종려주일인데 역시 위 설교 제목은 종려주일에도 맞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력에 상관없이 본문 강해설교를 한다는 것이 이렇게도 난처한 상황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요즈음 저는 너무나 절실히 느끼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바꿀 수도 없고 해서 그냥 준비된 설교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3월 20일자 인터넷 신문 뉴스앤죠이에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뉴욕장로교회 담임목사 불륜관계 고백 파문”. 그 기사에 의하면 미국 뉴욕에서 가장 큰 장로교회인 뉴욕장로교회에서 30년 가까이 특별한 잡음 없이 시무해 온 이 목사는 올해 갑작스레 안식년을 갖겠다고 발표해 주위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건강상 이유를 내세운 채 3월 4일 고별설교를 하고는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갔다가 불과 2주일이 지난 18일 주일에 예정에 없이 3분 예배 시간에 나타나 교인들 앞에 서서 뜻밖의 발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간음죄를 지었다. 진정으로 회개했다.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셨지만 성도들 앞에서 고백하기 위해 나왔다. 하나님께서 다윗도 용서하시고 간음한 여인도 용서하셨듯이 저도 용서하셨다. 성도들 앞에서 용서를 구하고자 한다.”
이 목사가 흐느끼듯이 발언하는 동안 교인들은 중간 중간에 한숨을 내쉬는가 하면, 특히 연로한 교인들은 ‘아멘’하면서 동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발언이 끝나자 교인들은 이 목사에게 박수를 보냈다고 뉴스는 전하고 있습니다.
보도에 의하면 이 목사는 30대와 50대의 두 여성도와 수년간 불륜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그러나 당사자들 간의 갈등이 확산되면서 이 문제가 밖으로 슬슬 새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목사는 올해 2월 중순 경 당회에 이런 내용을 알렸고, 당회는 이 문제를 조용히 매듭짓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회는 이 목사로 하여금 신병 치료를 이유로 안식년을 갖고 올해 12월 31일 사임하는 것으로 결정했으며 사임서도 미리 받아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목사가 한국에 가 있는 동안에 후임 목사를 물색할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교인들은 이런 내막을 알 리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목사가 갑자기 나타나 교인들 앞에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구한 것입니다. 양심선언 끝부분에 “하나님이 저를 용서하셨듯이 여러분도 저를 용서해 주시고,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제가 가는 앞날을 지켜봐 주시면서 짧지만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목사는 30년 전에 뉴욕 장로교회를 맡아 그동안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갖고 이 교회를 뉴욕에서 가장 큰 교회로 성장시켰으며, 그의 나이로 볼 때 앞으로도 10년 이상은 절대적인 힘을 갖고 이 교회에서 목회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주위에서는 보고 있습니다. 올해 5월에는 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내정되어 있고, 3천 만 불(300억 원)에 달하는 비전센터 건축 사업도 순조롭게 건축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목사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교인들에게 직접 양심선언을 함으로써 극적 반전을 노린 것이라는 평가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 교회 안에서는 이 목사에 대해서 동정하는 교인들과 반대하는 교인들로 갈라지는 징조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건은 한 남자가 얼마나 쉽게 제 7 계명 즉 “간음하지 못한다”는 계명을 어길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계명에 덧붙여 예수께서 하신 말씀, 곧 “남의 아내를 탐내어 그를 바라보는 사람도 누구나 이미 제 마음으로 그와 간음했습니다” 라는 말씀에 나오는 ‘탐내다’라는 단어를 통해 이것이 인간의 원죄에서 비롯되는 근본적인 죄악임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탐내다’라고 번역된 ‘탐욕’이란 단어는 어떤 물건이나 사람을 자기 소유로 삼고 싶어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창세기 3장 6절에 나오는 원죄이기도 하고,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나봇의 슬픈 이야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아담과 하와를 그곳에 데려다가 그 동산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창세기 2장 16-17절)
그러나 뱀이 나타나서 여자에게 물으면서 사건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는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셨다.” 개역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었지요. “죽을까 하노라.”
뱀이 다시 여자에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니 따 먹으라는 것이지요.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여러분 모두 아시는 일입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서 먹고,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그것을 먹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몸을 가렸다.” (창세기 3장 6-7절)
그렇습니다.
인간의 원죄는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있던 탐욕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인간의 탐욕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만들었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영역’에 있는 것을 제 것으로 만들겠다는 엄청난 범죄 행위를 저지르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탐욕이 인간에게 있어서 얼마나 본질적인 것이며, 또 동시에 끊어버리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유명한 왕 아합이 나라를 다스릴 때였습니다. 그는 이미 소유하고 있던 궁궐이 아주 넓었음에도 불구하고 궁궐을 좀 더 넓히고 싶었습니다. 궁궐 바깥의 땅을 차지해서 정원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합 왕이 넓히고 싶어 했던 땅의 주인은 나봇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이 궁궐 바깥에 있었고, 왕은 그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열왕기상 21장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합 왕이 나봇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대의 포도원이 나의 궁 가까이에 있으니, 나에게 넘기도록 하시오. 나는 그것을 정원으로 만들려고 하오. 내가 그것 대신에 더 좋은 포도원을 하나 주겠소. 그대가 원하면, 그 값을 돈으로 계산하여 줄 수도 있소.”
여러분!
아합은 그래도 괜찮은 왕 같아 보입니다. 강제로 빼앗자는 것도 아니고 바꾸든지 아니면 값을 좋게 쳐 준다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이때 나봇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조상의 유산을 임금님께 드리는 일은, 주께서 금하시는 불경한 일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땅은 그 옛날 모세의 뒤를 이어 가나안 땅 정복에 성공한 여호수아가 지파 별로 분배해 준 이후 조상대대로 물려받는 유산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조상들이 묻혀있고, 또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야 할 땅이었기에 그것을 판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상대방이 왕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더 좋은 땅으로 바꿔준다 하더라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남에게 판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봇은 왕의 요구를 거절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니까 왕이라고 해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합 왕은 그만 마음이 상해서 화를 내고 궁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음식도 먹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고 이때 왕비 이세벨이 등장하지요. 이세벨이 왕에게서 전후 사정을 듣고 나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현재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임금님이 아니십니까? 일어나셔서 음식을 드시고, 마음을 좋게 가지십시오.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임금님의 것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는 이세벨은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를 써서 그것을 나봇이 살고 있는 성읍의 원로들과 귀족들에게 보냅니다. 그는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게 하시오. 그리고 건달 두 사람을 그와 마주 앉게 하고, 나봇이 하나님과 임금님을 저주하였다고 증언하게 한 뒤에, 그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서 죽이시오.”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져서 거짓 증인들이 나타나 명령대로 하고 결국 나봇은 맞아 죽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아합 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아서 자기의 정원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합 왕의 탐욕과 왕비 이세벨의 간교함이 합해졌을 때 그만 그것은 나봇의 죽음이라고 하는 엄청난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한 인간의 탐욕은 나봇을 죽게 했을 뿐만 아니라 아합 왕 본인과 그의 가족에게도 엄청난 재앙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열왕기상 21장 20절 이하에 이렇게 기록되었던 것입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보자, 이렇게 말하였다.
“내 원수야, 네가 또 나를 찾아 왔느냐?”
그러자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임금님께서는 목숨을 팔아 가면서까지,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만 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재앙을 내려 너를 쓸어버리되, 너 아합 가문에 속한 남자는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씨도 남기지 않고, 이스라엘 가운데서 없애 버리겠다. 네가 이스라엘 사람에게 죄를 짓게 해서 나를 분노하게 하였으니, 내가 네 가문을,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가문처럼, 또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가문처럼 되게 하겠다.’
주님께서는 또 이세벨을 놓고서도
‘개들이 이스르엘 성 밖에서 이세벨의 주검을 찢어먹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합 가문에 속한 사람은, 성 안에서 죽으면 개들이 찢어 먹을 것이고, 성 밖에서 죽으면 하늘의 새들이 쪼아 먹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합의 탐욕이 나봇을 죽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합과 이세벨이 비참하게 죽고 그의 가족들이 멸망당하는 비참한 결과를 낳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간음, 즉 남의 아내를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탐욕이 이렇게도 엄청난 죄악이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저 간음행위를 피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고 정결치 못한 생각과 욕망까지도 몰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간음 금지 계명이 생각이나 말 또는 행위에 있어서 육체적인 욕망에 대한 최소한의 동의도 받아들이지 않음을 보여주심으로써 이 계명의 참되고 완전한 의미를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간음의 죄란 죄를 짓는 행위의 순간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탐욕의 눈으로 바라보는 눈길 그 자체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즉 다른 사람을 탐욕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이미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간음하지 말라는 제 7 계명을 더욱 깊이 해석하여 이웃의 아내를 탐내는 마음조차 갖지 말라고 명령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간음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서 제시하신 원칙이 제자들의 삶 전체에 적용된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29-30절 말씀입니다. 즉 계명 하나를 받아들이는 것은 모든 계명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계명 하나를 거부하는 것은 계명 전부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네 오른 눈이 너로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서 내버리고, 네 오른 손이 너로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서 내버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눈과 손을 예로 드셨을까요? 그것은 몸에 대한 셈족의 상징에서 눈은 어떤 대상에게, 상대방에게 자신의 욕망을 전하는 마음의 채널이며, 손은 마음먹은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누군가를 유혹할 때 눈웃음을 친다고 하고,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사랑의 마음을 나타내고 싶을 때 제일 먼저 손을 잡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께서는 눈을 빼버리고, 손을 끊어버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심한 말을 하실 수 있는 것인가요? 눈을 빼버리고, 손을 끊어버리라니요?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제자들 중에 이렇게 쳐다보기만 해서 음욕의 죄를 저지른 사람이 하나도 없었을까요? 그런데 그들 중에 누구도 눈을 빼거나 손을 끊은 사람이 없고, 초대교회를 비롯해서 2,000년 교회 역사에서도 그런 기록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즉 일시적 고통이 따르지만, 우리의 힘이 미치는 범위에서 포기하는 것이, 돌이킬 수 없는 데까지 즉 지옥에 이르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한 번 더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장 8-9절입니다.
“네 손이나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서 던져 버려라. 네가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손이나 발이 불구가 되어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빼어서 던져 버려라. 네가 두 눈을 가지고 불붙는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 눈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두 번씩이나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단편적으로 혹은 이것, 혹은 저것 하며 골라서 따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바치는 순종은, 우리를 망설이게 하는 일체의 것들, 심지어 눈과 손처럼 소중한 것까지도 가차없이 내던져 버릴 만큼 오롯하고 갈라짐없는 마음으로 하는 순종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눈과 손을 포함한 우리의 모든 것을 창조한 분이시고, 그래서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바쳐서 순종하지 않으면 결코 만족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동을 제어하기 위하여 마음에 명령하는 것, ‘간음하지 말라’ 는 명령을 따라서 간음하지 않기 위하여 그 마음에 간음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 그래서 그 마음의 명령에 따라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바로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축복,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입니다. 바로 이 말씀에 의지하여 진실로 깨끗한 마음을 소유하여 천국 백성이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