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12. 24 / 어둠에 빛을 / 마태복음 4:12-16
어둠에 빛을
마태복음 4:12-16/2006. 12. 24
기원전 732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700여 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이스라엘이 북왕국과 남왕국으로 나누어져 있을 때였습니다. 두 나라를 비교해 부면 남왕국은 다윗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는 하지만 땅도 작았고, 비옥하지 못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갈라져 나간 나라이기는 했지만 땅도 넓고 비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남왕국 유다보다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더 크고 더 강했습니다. 그래서 약 200년에 이르는 그 분단시대를 살펴보면 대개는 북왕국이 남왕국을 공격하고 괴롭히는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원전 732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시리아 왕 르신과 동맹을 맺고 함께 군대를 동원하여 남왕국 유다를 향해 쳐들어왔습니다. 이때 남왕국 유다의 왕은 아하스였는데 성경에 보면 그는 스무 살에 왕이 되어 열여섯 해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그는 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지 않았다고 열왕기하 16장 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쨌든 남왕국 유다보다 더 크고 강력한 두 나라, 곧 이스라엘과 시리아가 연합하여 쳐들어왔습니다. 이사야서 7장 6절에 의하면 이때 베가 왕과 르신 왕은 아하스 왕을 쫓아내고 외국인인 다브엘의 아들을 유다의 왕으로 세우려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 이제 연합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포위되었으니 이를 어찌할 것인가요? 어떻게 그것을 막아내고 살아남을 것인가? 이때 남왕국 유다의 아하스 왕이 생각해낸 전략, 그것은 바로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앗시리아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6장에 그때의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아하스는 앗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 왕에게 전령을 보내어,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임금님의 신하이며 아들입니다. 올라오셔서, 나를 공격하고 있는 시리아 왕과 이스라엘 왕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그런 다음에 아하스는 주의 성전과 왕궁의 보물창고에 있는 금과 은을 모두 꺼내어, 앗시리아의 왕에게 선물로 보냈다. 앗시리아의 왕이 그의 요청을 듣고, 다마스쿠스로 진군하여 올라와서는 그 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그 주민을 길로 사로잡아 가고, 르신은 살해하였다.“ (열왕기하 16:7-9)
그렇습니다.
아하스 왕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왕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는 조상 다윗이 한 대로 하지 않고, 오히려 이스라엘의 왕들이 걸어간 잘못된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는 자기의 아들을 불에 태워 제물로 바치기도 하였으니, 이것은,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이 보는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민족의 역겨운 풍속을 본받은 행위라고 열왕기 저자는 말합니다. 그는 직접 산당과 언덕과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지내고 분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한 아하스 왕이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가 국가적 위기에 처했을 때 취한 행동,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강대국 앗시리아의 군사력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전략은 일차적으로는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바로 이 시대에 활동했던 유명한 예언자가 한 사람 있었으니 우리는 그를 제 1 이사야라고 부릅니다. 이사야서 1-39장까지에 그 활동이 나와 있는 인물, 제 1 이사야입니다. 그 이사야가 아하스 왕 때 행했던 일들이 그의 책 7장 이하에 나오고 있습니다. 우선 7장 2절에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시리아 군대가 에브라임에 주둔하고 있다는 말이 다윗 왕실에 전해지자, 왕의 마음과 백성의 마음이 마치 거센 바람 앞에서 요동하는 수풀처럼 흔들렸다.”
그러니까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연합군이 쳐들어오기 전부터, 시리아 군대가 에브라임에 주둔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부터, 왕과 백성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벌벌 떨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두려워하지 말라고, 믿음 안에 굳게 서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 때에 주께서 이사야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너의 아들 스알야숩을 데리고 가서, 아하스를 만나거라. 그가 ‘세탁자의 밭’으로 가는 길, 윗 못 물 빼는 길 끝에 서 있을 것이다. 그를 만나서, 그에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침착하게 행동하여라’ 하고 일러라. 시리아의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 베가가 크게 분노한다 하여도, 타다가 만 두 부지깽이에서 나오는 연기에 지나지 않으니,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말라고 일러라.”』 (이사야서 7:3-4)
그러면서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너희가 믿음 안에 굳게 서지 못한다면,
너희는 절대로 굳게 서지 못한다!“ (이사야서 7:9)
그렇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떨고 있는 아하스 왕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고 굳게 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의 구세주이시며 당신 백성을 저버리지 않으시리라는 확신을 갖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이사야가 아하스 왕의 신앙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선포했던 그 유명한 징조, 그것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다윗 왕실에 한 징조를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사야서 7:14)
그리고는 이어서 그 아기가 잘못된 것을 거절하고 옳은 것을 선택할 나이가 되기 전에, 곧 얼마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안에 지금 공격해 오는 두 왕이 패망할 것이고, 그들의 땅이 황무지가 될 것이라고 이사야는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 예언처럼 앗시리아 원군은 이스라엘 북부 지역들, 곧 스불론, 납달리 지파의 땅 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수많은 주민들을 추방하였습니다. 이때 시리아는 망했고,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의 속국이 되어 아주 작은 나라로 간신히 목숨만 붙어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 왕국 안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들고일어나서 베가 왕에게 반역하여 그를 살해하고, 왕이 되었습니다. 이가 바로 북왕국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입니다. 그리고는 열왕기하 17장에 아주 비극적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으니 바로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입니다.
“유다의 아하스 왕 제 십이 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아홉 해 동안 다스렸다. 그는 주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 이전의 이스라엘 왕들만큼 악하지는 않았다. 앗시리아의 살만에셀 왕이 그를 치러 올라오니, 호세아 왕은 그에게 항복하고 조공을 바쳤다. 그러나 앗시리아 왕은, 호세아가 이집트의 소 왕에게 사절들을 보내어 반역을 기도하고, 해마다 하던 것과는 달리, 앗시리아 왕에게 조공을 내지 않는 것을 알고 나서는, 호세아를 잡아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난 뒤에 앗시리아의 왕이 이스라엘 전역으로 밀고 들어와서, 사마리아로 올라와 세 해 동안이나 도성을 포위하였다. 드디어 호세아 제 구 년에 앗시리아 왕은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앗시리아로 끌고 가서, 할라와 고산 강 가에 있는 하볼과 메대의 여러 성읍에 이주시켰다.“ (열왕기하 17:1-6)
여러분,
이때가 기원전 721년이니 이렇게 하여 북왕국 이스라엘은 200년 만에 망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북왕국 이스라엘의 터전이었던 갈릴리 지방과 중부 내륙지방은 앗시리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갈릴리 지방에는 많은 이방 민족들이 들어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베가 왕 시대에 앗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 왕이 쳐들어와서, 이욘과 아벨벳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의 온 지역을 점령하고, 주민들을 앗시리아로 사로잡아 갔다.” (열왕기하 15:29)
“이스라엘 자손을 사마리아에서 쫓아낸 앗시리아 왕은 바빌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으로부터 사람들을 데려와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성읍에 살게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사마리아를 자기들의 소유로 삼았으며, 이스라엘 성읍 안에 정착하여 살았다.” (열왕기하 17:24)
자, 보십시오.
앗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 왕이 쳐들어와서, 갈릴리와 납달리의 온 지역을 점령하고, 주민들을 사로잡아 갔고, 뒤이어 등장한 살만에셀 왕은 이방민족들을 데려다가 스불론과 납달리 땅을 비롯한 갈릴리 일대에 살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갈릴리 지방은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라고 불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러한 엄청난 사건들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예언자 이사야가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분명히 북왕국 이스라엘의 백성들도 자기들과 똑같은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그들 대다수가 포로로 끌려가고, 그 땅에 이방인들이 몰려와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예언자 이사야는 아하스 왕으로 인해 생겨난 그 엄청난 비극을 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시대는 바야흐로 암흑기였습니다. 이사야는 북부 지역의 형제들이 그렇게 비참하게 몰락하고 마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들의 장래가 그렇게 끝날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도무지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아무리 많은 죄를 지었다 해도 그들도 역시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그렇게 처절하게 멸망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렇게 내버려 두실 것인지, 그것이 진짜 하나님의 뜻인지 하나님 앞에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사야에게는 그야말로 절망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언자들에게 언제나 나타나듯이 인간이 보기에는 최악의 시기가 하나님께서 가장 큰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시기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음을 던지고 있는 이사야를 통해서 북부 지파의 운명을 새롭게 예언하셨습니다.
“어두움 속에서 고통받던 백성에게서 어두움이 걷힐 날이 온다. 옛적에는 주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받게 버려두셨으나, 그 뒤로는 주께서 서쪽 지중해로부터 요단 강 동쪽 지역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방 사람이 살고 있는 갈릴리 지역까지, 이 모든 지역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
‘하나님,
주께서 그들에게 큰 기쁨을 주셨고,
그들을 행복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곡식을 거둘 때 기뻐하듯이,
그들이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군인들이 전리품을 나눌 때 즐거워하듯이,
그들이 주님 앞에서 즐거워합니다.
주께서 미디안을 치시던 날처럼,
그들을 내리누르던 멍에를 부수시고,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던 통나무와
압제자의 몽둥이를 꺾으셨기 때문입니다.
침략자의 군화와 피 묻은 군복이
모두 땔감이 되어서,
불에 타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 (이사야서 9:1-5)
그렇습니다.
이사야는 분명히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았지만 그러나 그가 본 비극이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래에 대한 최후의 선고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야훼께서는 그들의 슬픔을 큰 기쁨으로, 전쟁에서 얻은 승리의 기쁨보다 더 큰 기쁨으로 바꾸어 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사기 7장에 나오는 것처럼 야훼께서는 기드온 시대에 미디안 사람들의 억압을 깨뜨려 버리셨듯이 그들이 지금 짊어진 압제들에 의한 멍에도 부수어 주실 것이며, 전쟁의 표지들은 모두 불에 타 사라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야훼께서는 다윗 왕에게 하신 약속들을 충실히 지키시기 때문에 반드시 그렇게 해 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날이 언제입니까? 언제 그렇게 좋은 날이 온다는 말입니까? 지금 사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데 그런 날이 언제 올 줄 알고 기다린다는 말입니까? 이사야는 말합니다. 그날은 바로 한 아기가 태어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서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얻었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의 왕권은 점점 더 커지고
나라의 평화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가 다윗의 보좌와 왕국 위에 앉아서,
이제부터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다.
만군의 주의 열심히
이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이사야서 9:6-7)
여러분, 보십시오.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인데,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입니다. 그분은 이제부터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굳게 세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 예수입니다.
그렇습니다.
제 1 이사야가 700여 년 전에 했던 바로 그 예언이 이제 마침내 이루어졌음을 마태복음 기자는 선포합니다.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듣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 그리고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 바닷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다.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스불론과 납달리 땅,
요단 강 건너편,
바다로 가는 길목,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었다.‘ “ (마태복음 4:12-16)
그렇습니다.
예수가 고향과 출생지는 베들레헴이면서도 굳이 갈릴리로 가셔서 나사렛에서 사신 것은, 그리고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신 것도 바로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라고 손가락질 받던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야말로 로마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 핍박과 수탈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동족인 유대지방의 유대인들로부터도 이등국민 취급을 당해야 했던 갈릴리 사람들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가 성탄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사실은 내일이 25일, 성탄절이고 오늘밤이 성탄절 이브이니까 오늘밤은 세상이 떠들썩하고 술집마다 사람이 넘쳐나겠지요. 교회들과 거리에는 네온이 번쩍이고, 사람들은 그 불빛을 따라 정신없이 떠돌아다니겠지요.
그러나 여러분!
오늘 제가 드린 이야기들, 2,700년 전에 있었던 이사야 이야기라든지, 또는 2,000년 전에 아기 예수가 태어나셨다는 이야기들이 그냥 옛날에 있었던 일일 뿐이라면 이것을 우리가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고, 제가 목소리 높여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시간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우리들이 ‘이방인의 갈릴리’라고 부르는 땅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바로 한반도 북녘 땅에 있는 우리 동족들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북녘 동포들이 당하는 고통이 바로 2,700년 전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던 고통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당시 앗시리아라는 최강대국이 북왕국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히다가 결국 멸망시킨 것처럼 오늘날 세계 최강대국이라는 나라가 북한을 위협하고, 압박하고, 그 나라를 없애려고 애쓰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땅에 사는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동시에 당시 유대 나라에서 자기들이 앗시리의 도움을 받으면 자기들은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앗시리아에게 도움을 청했던 아하스 왕처럼, 결국 북왕국이 망하고 나면 그 다음 차례는 자기들인 것을 깨닫지 못한 채 강대국에게 의지했던 것처럼 오늘날 이 땅에도 강대국의 힘에 의지해서 우리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있는 것, 여러분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예언자 이사야가 오늘 이 시대에 나타난다면 무어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저 북녘 땅만 어둠의 땅이 아닙니다. 사실은 이 땅에도 그런 곳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와 같은 작은 교회들도 어둠의 땅이요, 죽음의 그늘진 땅입니다. 저 강남의 부자동네 옆에 있는 천막촌이나, 노숙자들의 숙소, 불법 체류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거하는 쪽방들 이 모두가 어둠의 땅이요, 그들이 죽음의 그늘진 땅에 거하는 사람들입니다.
성탄절,
그것은 단순히 크리스마스 츄리를 밝히는 날이 아니라 이 땅에 남아 있는 이방 사람들의 땅,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는 날입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교회 자체를 밝히는 불은 줄여나가야 합니다. 건물을 짓고, 화려하게 장식하고, 교인들끼리 밝히는 불은 꺼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상의 빛이십니다. 우리 모두 그 빛을 받아 어둠을 몰아내는 일을 해 나갑시다. 빛이신 예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