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06.9.17-10.4.18)/2006 년도

2006. 10. 29 / 라헬의 통곡소리 / 마태복음 2:16-18

람보 2 2015. 4. 2. 15:45

라헬의 통곡소리


마태복음 2장 16-18절/ 2006년 10월 29일



  세계 4대 문명의 발생지 중 한 곳인 이집트에 가면 참으로 오래된 파피루스 두루마리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중에는 4,000년도 더 된 것들이 있는데 분량도 굉장히 많습니다. 기후가 워낙 건조하다보니 보관이 잘 된 것도 이유가 되겠지요. 그리고 그 중에 소위 ‘사자의 서’(死者의 書) 그러니까 ‘죽은 자들의 책’이라고 불리는 책이 있는데 그 내용은 저 세상, 곧 죽음 이후의 세상에서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는 보호주문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 책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죽음 이후에 심판을 받는다고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태양신 라(Ra)의 배에 올라타서 하늘의 강(은하수)을 건너, 밤이 되면 강의 서쪽에 도착합니다. 죽음 후의 세계를 지배하는 신을 이집트인들은 오시리스(Osiris)라고 불렀는데 죽은 사람이 그 궁전 앞에서 기다리고 있노라면 아누비스(Anubis)가 죽은 자를 ‘심판의 방’으로 인도합니다. 거기에서 망자들은 ‘몸을 순수하고 깨끗하게 하며, 흰옷과 신발을 착용하고, 검은색 눈 화장을 하고 몰약을 바르게’ 됩니다. 재판장 앞에 설 준비를 하는 것이지요.

  재판장 오시리스가 왕좌에 앉아있는데 그 앞에 저울이 하나 놓여 있습니다. 이름하여 ‘정의의 저울’입니다. 아누비스는 죽은 자의 심장을 저울의 한쪽 접시에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아누비스는 진실의 여인 마아트(Maat)의 머리 장식에서 깃털 하나를 뽑아 반대쪽 접시에 올려놓고 함께 무게를 답니다. 만약 죽은 자의 심장이 얹힌 접시가 죄의 무게 때문에 아래로 쳐지면 ‘정의의 저울’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무시무시한 작은 괴물 암미트(Ammit)가 그 죽은 사람의 심장을 먹어치우고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것이 죽은 사람의 종말이라는 것이지요.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아람어 번역본인 타르굼에 의하면 출애굽기 1장에 나오는 파라오가 꿈에 바로 그 ‘정의의 저울’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잠을 자던 중에 파라오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파라오는 ‘정의의 저울’을 보았는데 한쪽 저울판 위에는 이집트 온 나라가 얹혀 있었고, 또 다른 저울판 위에는 어린양, 곧 새끼 암양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어린양이 얹혀 있는 저울판이 내려가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난 파라오는 그 꿈의 내용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파라오는 즉시 이집트의 모든 마법사, 현자들을 불러 이 꿈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마법사들의 우두머리인 얀네와 얌브레는 곧 입을 열어 파라오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에 한 아들이 태어날 예정입니다. 그 아이 때문에 이집트 온 나라가 폐허가 될 것입니다.’

  그러지 이집트 왕 파라오는 유다인 산파들에게 명령하였다.

  ‘히브리 여인들이 해산하는 것을 도와줄 때에, 아이들을 살펴보고 만일 사내아이면 죽여버리고, 여자아이면 살려두어라.’ “


  그렇습니다.

  이집트의 왕 파라오는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죄없는 어린아이들을 죽이라는 무지막지한 명령을 내리고 맙니다. 그런데 산파들이 그 명령을 교묘하게 어기자 파라오는 이어서 사내아이들은 강물에 던져 버리고, 여자아이들만 살려두게 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엄마들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게 되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바로 그 엄청난 고통과 혼란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인 것을 출애굽기 기자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름도 그 유명한 헤롯, 그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와 구별하기 위하여 헤롯 대왕이라고 불리는 그 헤롯 왕, 그가 바로 출애굽기에 나오는 파라오와 같은 일을 저지른 인물이라고 마태복음 기자는 오늘의 본문에서 증거합니다.

  그의 아버지 안티파텔이 로마 제국의 앞잡이가 되어 가나안 땅의 통치자가 된 것이 기원전 55년경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권위를 등에 업고 권좌에 오른 헤롯 대왕은 기원전 40년경에 로마로부터 유다, 이두매, 베레아, 갈릴리 지방을 포함한 가나안 땅 전체를 다스리는 왕으로 임명받아 그 잔혹한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왕이 된 헤롯은 유대인들로부터 엄청난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유대인들은 헤롯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 헤롯은 로마의 앞잡이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3년 동안 헤롯은 로마군대와 함께 그의 군대를 이끌고 가나안 전역을 돌아다니며 식량을 약탈하고 대량학살을 자행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11개 보병대대와 6,000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기원전 37년 예루살렘 성을 포위했습니다. 이때의 장면을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의 책 유대전쟁사에서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군대가 밀려오자 대대적인 학살이 벌어졌다. 포위상태가 오래 계속된 나머지 로마인들은 격분한 상태였고, 헤롯 군대의 유대인들도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이들은 한 명도 살려두지 않을 것을 각오했다. 사람들은 좁은 거리에서, 그리고 집에서 성전으로 도망가다가 잡혀 죽었으며, 어린이건 노인이건 약한 여자건 간에 무참히 살육당했다.”


  여러분,

  이렇게 권력을 잡은 헤롯은 로마의 황제가 바뀔 때마다 엄청난 뇌물을 바침으로써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뇌물을 바치기 위해서는 당연히 백성들로부터 수탈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백성들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려웠다고 합니다.

  또한 헤롯은 자기의 왕위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무자비한 학살과 폭정을 저질렀습니다. 그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곳곳에 성벽을 쌓아올리고, 비밀경찰과 스파이를 곳곳에 숨겨놓고, 잔인한 보복으로 공포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저항운동을 일으키지 못하게 했습니다.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에 의하면 헤롯 대왕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곳인 성전 건물 안에 자기를 위한 탑을 하나 짓게 하고, 거기와 통하는 비밀지하도를 만들어서 유사시에 ‘백성들이 왕에게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자기를 보호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차하면 가서 숨을 곳을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독재정치가 무려 30년이 넘게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로마가 임명한 ‘유대인의 왕’, 완전히 불법적인 그 왕 밑에서 민중은 군사적 학대와 경제적 빈곤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삶의 길이 훼손당하고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고, 개인적인 삶은 억압적인 통제를 받아야 했습니다. 여기 앉아있는 오 선생님이 그리스에 가서 직접 철학을 공부하고 온 사람입니다마는 헤롯 왕이 희랍 문화를 받아들여서 곳곳에 경기장을 세우고 운동경기를 펼치면서 유대인들이 지녀온 전통적인 가치관과 신앙의 길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억압과 혼돈의 세월을 보내면서 민중은 해방을 갈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민중들에게 들려온 소식, 그것이 바로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것, 그것은 민중들에게는 해방의 소식이요, 구원의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이제 살았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셨다’고 하면서 감격할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헤롯 대왕에게는 엄청난 충격과 도전이요, 멸망의 나쁜 소식이었습니다. 왕이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니, 이건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취한 행동이 바로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을 죽이라는 명령이었던 것입니다.

  “헤롯은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몹시 노하였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그 박사들에게 알아본 때를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가까운 온 지역에 사는, 두 살짜리로부터 그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였다.”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마는 왜 하필이면 두 살짜리로부터 그 아래인가요? 동방박사들이 처음 별을 보고 그것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왔는데 그들이 오는데 걸린 기간이 2년이기 때문이 아닐까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본문 16절에 ‘그 박사들에게 알아본 때를 기준으로 하여’ 라고 하는 구절이 나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보십시오. 마태복음 기자는 이런 기록을 덧붙여 놓았습니다.

  “이리하여 예언자 예레미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울부짖으며, 크게 슬피 우는 소리다.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우는데,

  자식들이 없어졌으므로,

  위로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


  여러분!

  라헬이 누구인지 아시지요? 라헬은 자기 언니 레아와 함께 야곱의 아내였습니다. 오랫동안 아기를 낳지 못하다가 마침내 요셉과 베냐민을 낳았던 여인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만 베냐민을 낳을 때 산고를 겪고 그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라헬이 죽으니, 사람들은 그를 에브랏 곧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 가에다가 묻었다. 야곱이 라헬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웠는데, 오늘날까지도 이 묘비가 라헬의 무덤을 가리키고 있다.”   (창세기 35:19-20)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한 때로부터 기원전 587년 남왕국 유다가 멸망당할 때까지, 라헬이 낳은 베냐민의 후손들은 라마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모여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남왕국 유다가 신바빌로니아 왕국에게 패망하여 포로로 잡혀갈 때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라마 주변에 살던 베냐민 부족도 포로로 잡혀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자 예레미야는 라헬의 후손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보면서 라헬의 무덤에서 구슬픈 곡소리가 들린다고 노래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기자는 창세기의 기록을 보고 라마가 곧 베들레헴이라고 생각해서 오늘의 본문에 예레미야의 예언을 기록해 놓았던 것입니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울부짖으며, 크게 슬피 우는 소리다.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우는데,

  자식들이 없어졌으므로,

  위로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자, 그렇다면 도대체 마태복음 기자는 왜 이런 끔찍한 이야기를 기록해 놓았을까요?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대체 무엇인가요?


  여러분!

  이스라엘 민족은 이미 두 번씩이나 대학살을 경험했었습니다. 첫 번째는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 때 파라오가 사내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그때는 사실 이스라엘 민족이 무슨 큰 죄를 지고, 그 죄의 값으로 대학살을 경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노예로 고생만 하다가 억울하게 당한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바로 예언자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바로 그 시기였습니다. 기원전 597년부터 587년까지 바빌로니아에게 포위당했을 때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제멋대로 살던, 우상숭배에 빠져있던 이스라엘 민족은 결국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바빌로니아에게 공격당하고, 예루살렘 성이 포위되어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도 역시 제일 큰 고통을 겪던 것은 바로 어린아이들이었습니다.

  남왕국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때 삼 년 동안이나 예루살렘 성이 포위되어 도성 안에 기근이 심해지고, 그 땅 백성의 먹을 양식이 다 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으니(열왕기하 25:2-3),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마침내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이 먼 채, 바빌로니아로 끌려갔고, 가난한 백성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포로로 끌려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번째 고통은 왜 당했는가? 예레미야에 의하면 그것은 물론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배반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제 세 번째 대학살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헤롯 대왕에 의해서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이 죽는 사건입니다. 그 어린아이들이나 그 부모들이 무슨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헤롯 대왕의 명령 하나로 죄없는 어린아이들이 죽임을 당했고, 그 부모들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렇다면 헤롯 대왕은 도대체 왜 이렇게 말도 되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명령을 내렸던가요? 아무리 왕이라지만 어떻게 그렇게도 무자비한 명령을 내릴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권력자로서의 광포와 두려움어린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권력에 맛들여 제 마음대로 휘두르다가 권력에 중독되어버린 그 오만함과 자기의 권력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오는 질투가 그야말로 보잘 것 없고, 아무런 힘도 없는 어린아이들을 죽이고 말겠다는 집착에 빠지게 만든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저는 여기서 뜻밖에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특히 마태복음 27장 24-26절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빌라도는, 자기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과 또 민란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고 말하였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오.’

  그러자 온 백성이 대답하였다.

  ‘그 사람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시오.’

  그래서 빌라도는 그들에게,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한 뒤에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넘겨주었다.“


  여러분!

  바로 이 구절은 유독 마태복음에만 나온다는 것 아시나요? 다른 세 복음서에는 이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마태복음에만 유대인들이 나서서 ‘그 사람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시오’ 라고 소리지르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습니까?

  이스라엘의 온 백성이 ‘그 사람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시오’ 하고 소리치던 날, 온 백성을 사로잡은 그 오만함과 질투로 말미암아 예수를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넣고 맙니다. 그리고 예수는 그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길을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기 예수는 헤롯 왕으로부터 나온 죽음의 위협은 벗어났으나 이제 그분은 스스로 당신 자신의 몸을 악과 죽음에 내어주심으로써 당신 백성을 유배에서, 즉 죄에 얽매인 종살이로부터 다시 데려오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죄없는 어린아이들의 죽음을 통해서 장차 예수가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가 그 어린 몸으로 이집트에 내려가심으로써 앞으로 두 번째 출애굽 사건이 있을 것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는 새로운 모세로서 당신을 믿는 자들을 죄로부터 구원해 주실 분임을 보여주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헤롯 왕이 두 살짜리로부터 그 아래 사내아이들을 죽인 사건을 기록함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이 저지른 죄악, 곧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떠나갔던 일을 기억하고 이제 예수께서 이스라엘 민족이 저지른 죄악을 짊어지고 십자가의 길을 걸음으로써 수난과 부활을 통한 구원을 이루실 것을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앞으로 예수가 살아갈 생애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길인지를 보여주는 예고편인 것입니다. 예수 그분은 끊임없이 죽음의 위협을 당하고 고난을 겪다가 끝내 권력의 광포와 백성들의 질투에 휘말려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임을 보여주는 예고편이라는 말입니다.


  강남에서 목회하는 제 친구 목사가 보내준 설교 중에서 제가 이런 글을 읽은 것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이 속해 있는 그 지방에 있는 다른 교회 목사님의 설교시간에 이런 설교를 했더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인지 아닌지를 따져봅시다.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하여도 기뻐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십자가 군병입니까? 영혼구원을 위해 내 한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주님이 가라고 하면 아골 골짝 빈들에도 갈 수 있습니까?

  아니면 오직 돈 잘 벌고, 사업이 잘 되고, 가족들 건강하고, 자식들 잘 되고, 만사형통하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모두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주님의 제자가 되십시다. 어떤 고난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살아가는 성도가 되십시다. 육신의 일은 주님께 맡기고, 어찌되든 모두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며 감사하십시다.“

    

  물론 이 설교문 안에는 저하고 잘 맞지 않는 표현도 있습니다마는 어쨌든 그 목사님이 하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인지는 쉽게 알 수 있지요. 그런데 그렇게 설교를 하자 예배 분위기가 아주 무겁게 가라앉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 주 중에 어느 집사님이 개인적으로 목사님을 찾아와서 말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말씀이 다 옳기는 합니다마는, 저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말씀입니다. 제 신앙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서 다른 교회로 옮기겠습니다. 제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그런 교회로 가겠습니다.”

  그래서 교인 하나를 놓쳤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이런 설교를 차마 못하지요. 여기서 더 빠지면 큰일이니까요.


  여러분!

  오늘의 본문은 주님께서 걸어가실 길이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 길을 너희들이 따라가겠느냐고 우리들에게 묻는 것이 아닌가 그런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모든 것이 잘 되고, 모든 것이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지면서 만사형통할 때만 주님을 따른다면 그것을 어찌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사는 것이 힘들고, 내 뜻대로 되지 않고, 어려움에 처하게 될 때 오히려 그때 주님을 따르는 것이 진정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모두 오늘의 본문 속에서 주님이 걸어가실 길을 바라보면서 비록 그 길이 힘들고 어렵지만 나는 그 길을 따르겠노라고 다짐하고 결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